가스레인지
어느 날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니 목소리가 몹시 기분이 무척 나쁘신 것 처럼 들립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여쭤 보았더니 가스레인지가 고장 났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평일에는 보호센터에서 식사를 모두 해결하시는 터라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바쁘니까 일요일에 고쳐 드릴게요."
그러자 알았다고 대답은 하시는데 계속 언짢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반응이 신경 쓰여 좀 일찍 퇴근을 하고 어머니 댁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직 보호센터에서 돌아오지 않으셨기에 싱크대로 가서 가스레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불을 켜 보려고 했지만 불꽃이 튀지 않아 점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 실력으로는 어찌 해 볼 수가 없더군요.
아무래도 가스레인지를 바꿔드려야 할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돌아오셨고, 가스레인지 때문인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셨습니다.
가스레인지를 새 것으로 바꿔드리겠다고 말씀드리자 기분이 조금 풀리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계속 해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스레인지가 어머니에게는 무척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죠.
집에 돌아 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행히 어머니 댁에 설치되어 있는 가스레인지와 똑같은 모델을 팔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단기기억 상실증세가 심해져서 가전제품의 스위치 위치만 바뀌어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 몹시 당황해 하셨거든요.
그래서 가스레인지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물건은 반드시 그동안 사용하시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사드려야 했습니다.
주문을 마치자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가스레인지는 도시가스와 연결해야 하므로 전문가가 설치해야 했고, 따라서 비록 쇼핑몰에서 주문을 하여도 반드시 전화 상담을 거쳐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마침 토요일에 설치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어머니 댁으로 향했습니다.
약속 시간이 되자 가스레인지 설치기사가 도착을 하였고 능숙한 솜씨로 새 가스레인지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설치를 마치고 가스레인지가이상없이 작동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더니 조심스런 손길로 스위치를 돌리셨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염이 올라왔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 꽃이 피어올랐습니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이 결혼을 한 육십대 후반까지 가족을 위해 매일 음식을 준비하는 가정주부이셨습니다.
주부에게 가스레인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가스레인지가 고장 나 있던 3, 4일 동안 어머니는 거의 공황 상태이셨던 것 같습니다.
치매가 아니셨다면 전기오븐 같은,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다른 제품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오로지 가스레인지, 그것도 나온 지 10년도 더 된 구식 모델이 아니면 수십년 매일 반복하셨던 주부 역할을 포기하셔야 한다니 당황하실 수 밖에 없었겠지요.
가스레인지는 군인에게 총이, 화물차 기사에게 트럭이 소중한 것 처럼 어머니에게는 자존심이자 가족 다음으로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이젠 그런 존재도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가전 제품 사용법을 하나씩 잊어버리고 있으니까요.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에어컨, 전기밥솥...
이젠 어머니 댁에 갈 때 마다 저도 가스레인지를 한번씩 켜 봅니다.
어떤 때는 그 불꽃이 어머니의 생명을 지탱해 주는 불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