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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Feb 09. 2023

대기업10년차, 갑자기 왜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거야 2

10년의 방랑자

대기업의 탑다운식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주체성을 말살당한 자의 공허한 마음은, 그간의 삶에서 돈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 했던 욕망들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가장 큰 삶의 혜택은 안정적인 수입이었다. 내가 배우의 길을 선택하지 못 한건 순전히 풍족하지 못 한 자본 때문이었으니까, 바꿔말하자면 대기업 직장인을 선택한 이유는 풍족한 자본이었으니까, 이 돈으로 나의 꿈만 제외한 모든 욕망을 탐하고 충족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직장인이면서도 동시에 할 수 있는, 배우와 유사한 업으로의 조율이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전전하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해외 배낭여행을 혼자 떠난 적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는 상황이 좋았던지라, 좋아하는 해외 여행을 매해 떠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직장의 휴가 사용이 자유로웠고, 휴일을 끼면 최대 3주까지도 해외를 나갈 수 있었다. 고전소설 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세계문학 서적을 읽고 그 속에서 흥미로운 도시를 발견하면 여행할 곳을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매년 여행을 다니면서 심적 공허감을 달래었고, 여행 에세이 작가라는 또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외항사 승무원을 도전하기도 했다. 떠도는 삶이 좋은 거라면, 해외에서 사는 것도 좋았고, 승무원을 해서 이곳 저곳 여행을 다니는 혜택을 받는 게 좋아보였다.


외항사 승무원은 예기치 못한 건강상의 문제로 오랫동안 일할 수 없을 것도 같았다. 그걸 대비해서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어느 국가든지 스포츠센터는 있었고, 필라테스를 영어로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수입원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 모든 방랑과 또 다른 꿈으로의 도전은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외항사 면접을 한 번 봤었는데, 코로나19가 닥치고서는 합격 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조차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메일을 받게 되었다. 이제 또다른 꿈을 향한 시작이었는데, 도전해 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했겠지만, 코로나19를 맞이해서 느낀 주된 감정은 ‘무기력함'이었다. 모든 외부활동들이 취소되기도 했고, 가끔은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집안에서 격리하기도 했다. 예측이 불가능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특히 내가 꿈꿨던 부류의 일들은 대안 없이 중단되었다. 그때부터 잠을 많이 자게 되었고, 꿈을 많이 꾸게 되었다.


한 가지 다행인건 2019년 5월달에 회사 내에서 새로운 팀에 발령받아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금융혜택 앱 서비스 기획자였는데, 아이돌 전문 OTT플랫폼을 담당하는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이돌이 출연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수급, 제휴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어느날 ‘창작’이라는 부류의 업무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표현하고 창작하는 일, 배우와 유사한 결이었다. 기획안을 구상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세상에 없던, 나의 생각과 의견이 들어간 프로그램을 기획한 다는 것, 어쩌면 PD라는 꿈이 내가 해 오던 일의 연장선상에 있고, 생계도 책임질 수 있으면서도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만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성하는 업무는 다이나믹했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잠을 많이 자기도 하고, 매일같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는 내가 미처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 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기본적으로는 날아다니는 것이던지, 코로나19시대 이전처럼 해외여행을 간다던지, 그런데 그 해외여행지가 현실에 있는 곳은 아닌 내가 만들어낸 그런 세상 속이었다던지. 급기야는 꿈 속에서 스스로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자각몽을 꾸면서, 루시드 드림을 매번 경험하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속에서 방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색이 선명한 꿈을 꾸게 되었다. 아마도 좋아하는 삼청동의 거리였을 거다. 이것조차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 거리이지만, 꿈 속에서는 삼청동 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있는, 한적하고 좋은 기운들이 서려있는 삼청동 거리. 밝은 날이었고, 아직은 한기가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냄새, 막 봄이 오려는 듯한 봄빛. 거리를 걷다 큰 나무 하나를 마주했고,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새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커다랗고 하이얀 목련 꽃봉오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경이로운 감탄의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고 무언가가 충만한 기분이 들었고, 어떤 뜻모를 희망이 내 안에 가득 차는 듯한 느낌으로 잠에서 깨었다.


그날의 꿈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떤 희망이 가득한 마음. 도대체 어떤 희망을 나는 그토록 품고 싶은 걸까. 왜 여전히 나는 떨칠 수 없는 열망에 허탈해 하고 있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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