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비 Feb 07. 2023

대기업10년차, 갑자기 왜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거야 1

나에게 대기업 직장인이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한 질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는 입사를 같이 하고 10여 년간 같은 회사를 함께 다닌 친한 회사 동기다. 2023년 1월 첫째주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요즘 연기를 배운다고 선언했다. 나에겐 전혀 갑작스러운 결심이 아니지만 10년을 회사에 같이 잘 다닌 동기가 보기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나보다.


입사할 때부터도 나는 스스로를 ‘외딴 섬’이라 여겼다. 공부를 착실하게 하며 학창시절을 보내고,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내며 반장도 하는 타의 모범이 된 모범생. 그리고 순탄하게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이어서 들어간 대기업까지. 그런 삶의 과정이 유사한 사람들이 나의 입사 동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과정을 밟아왔다고 해서, 그 과정 밖의 삶까지 같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과정들이 차근차근 밟아가야 할, 다른 삶은 생각하지도 않아본,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기도 하는, 누군가는 열망하기도 하는 윤택한 삶이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삶은 배우라는 다른 삶이었지만, 그 삶에 모든 걸 걸기에는 내가 쥐고 있는 윤택한 삶을 버릴 용기는 없었다.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 공부는 꽤나 정직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한 만큼 성적이 나왔고, 하기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었다.


한 번도 실패해 보지 않았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실패의 확률이 높은 길을 한 번도 도전을 해 보지 않았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도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도전하는 일은 드물었다. 도전을 한다면 돈이 벌리는 사업이라던지,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오는 학위를 추가로 획득한다던지 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예술은, 다른 길들에 비해 조금 더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었고, 투입되는 것에 비견되는 결과를 응당 기대할 수 없었다.


배우가 되는 길을 도전하자니 막막했다. 어떤 커뮤니티도 없었고, 어떤 길이 있는지 보이지조차 않았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실패할 것만 같았다. 상경계 소속의 친구들은 내가 예술을 하고 싶다는 내색이라도 조금 내비치면, 멋있다고도 입바른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지금 와서 돼? 또는 그게 돈이 돼? 라는 관점에서 쓸모없는 가치였다. 나는 사회적으로 꽤나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무리에 속해 있었지만, 그 무리가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에게 배우가 되는 길은 매우 위험하고도 무모한 선택이었다.


비판적인 의견들이 주변의 대세였고, 일단은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금 잘 하는걸 해보라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가게 되었다. 업으로 삼지 않고도 취미로 병행할 수 있지 않겠냐, 업이라는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으면 더 행복할 수 있지 않겠냐는 관점이었다. 나 역시도 생계를 포기하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해왔던 잘 하던걸 계속 하면 어떻게든 평탄하게 살 수는 있었다. 그렇게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0년 동안 대기업을 다니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더 힘들었다. 너무나 안락한 삶이었다.


특히 대구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지방 출신이기 때문에 당장 돈을 벌지 못 하면 서울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 신세였다. 서울의 물가는 높았고, 한 몸 뉘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지방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대출해야만 했다. 빚을 내려면 신용이 필요했고, 학생의 신용이 끝이 났을 땐 대기업의 신용으로 은행에 대출을 해야 서울에 머무를 수 있었다. 대기업의 이름은 김혜진이라는 개인의 이름에 비할 수 없을만큼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존재였다.


실패한 적 없는 삶에서 실패의 확률이 큰 삶으로의 도전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도전을 주위에 공공연하게 선언한다는 것이 크게 두려웠다. 실패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당차고, 똑똑하고, 뭐든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입사를 하면서 배우의 꿈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주어진 24시간은 회사를 다니며 배우고 적응하는 데에 맞춰졌다. 회사에서 처음 배운건, 나의 의지를 지우는 일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야 했다. 회사는 나를 회사에 잘 적응하도록 제너럴리스트로 만들었고, 나의 희망과 의지는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기업의 삶은 배우의 꿈까지 잊게 만들려 들었다. 주체적인 희망과 의지 없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데에만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나의 생각과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내가 어떤 걸 주체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힘이 약해져만 갔다.


-계속-

이전 02화 꿈을 꾸는 배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