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기도 포근하기도
아빠의 인도행이 결정된 건 단 하루만의 일이었다. 물론 그날엔 우리 모두 새벽 두 시가 다 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틀 만에 결정된 일이다. 한국의 회사에서 25년 남짓을 일했던 아빠에게 인도행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모든 강아지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반대하는 사람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가족 모두도 처음에는 떨떠름했지만, 50대 남자에겐 분명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결정된 후의 일은 속전속결이었다. 삼 개월 만에 아빠는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고, 우리는 급하게 이사를 했다. 캐리어에 짐을 가득 담은 채로, 우리는 결국 출국장에서 울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지만 한동안의 이별 앞에서 덤덤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엄마와 내가 평소에 코끝이 찡해지는 빈도수를 생각해 보면 반드시 울 것이라고 예견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작별의 순간이 턱밑에 차올라도 우리는 고개를 치켜들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눈물과 함께하는 순간은 기어코 오고야 만 것이었다. 물론 출국장에서 잠시 서글프다가 금세 눈물을 닦고 씩씩하게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며칠간 별안간 닥치는 허전함을 안고 사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사람의 적응력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아빠와의 작별로 눈물 흘리고, 허전함에 괜히 거실을 서성이고, 명절의 계획을 모조리 수정하고, 커튼을 위해 벽에 박는 나사못 하나에 쩔쩔매는 시간들을 보내다가도 자연스럽게 둘이 앉아 집의 공백을 채우는 일에 익숙해졌다. 고라니와 산 뿐인 시골에서의 삶도 아득해졌다. 주말마다 들끓던 사람들과 열심히 짖던 강아지, 고기 굽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던 마당이나 늘 훈훈했던 아궁이들을 떠올리면 맞아 그런 때가 있었지. 하면서도 정말 있었나 하게 된다.
우리는 순식간에 아빠가 없는 집과 마당 없는 아파트에 익숙해졌다. 능숙하게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늦은 밤에 가로등빛을 보며 보도블록 위를 걷는 생활 또한 손쉽게 접했다. 물론 요즘엔 인터넷이 워낙 잘 되어있다 보니 인도에 있는 아빠와도 전화나 문자를 매일 할 수 있어서 더 쉽게 익숙해진 것도 있겠다. 마냥 먼 나라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법 한 익숙한 마음에 아련하고 찡하다가도 계속되는 요구와 연락에 미안하지만 핸드폰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두 달여를 그렇게 지내다, 문득 빈자리가 실감 났던 날이 있다. 역시나 연말이었다. 집집마다 새벽에 뜨는 해를 보기 위해 여정을 떠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보신각의 타종행사를 보는 시간들. 아빠가 한국에 있었다면 분명 시끌벅적한 연말이 되었을 것이다. 아빠가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아빠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아빠에게 조용한 연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린 여전히 마당이 있는 집에서 고기를 구웠을 테고, 언제나처럼 사람들은 찾아와 춥고 따뜻한 연말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아빠가 없자 나의 주변은 아주 조용해졌다. 처음엔 그런 조용함이 마냥 좋았다. 하지만 연말이 되자, 그 이름이 주는 왁지지껄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느껴버린 거다. 우리는 아빠가 없는 연말 안에서 멍하니 있었다. 인도와 한국의 간극이 꽤 크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얼마나 특별한 연말연초를 보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한국에 남은 우리 세 가족은 처음으로 셋 만의 연말을 맞이했다. 물론 보신각 종이 울리는 순간엔 셋, 아니 넷 모두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고,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연말이 주는 쓸쓸함과 설레임에 잠 못 이루기도 했다. 처음으로 인도의 연말은 여전히 덥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 아빠는 반소매 옷을 입은 채 손을 흔들었다. 참으로 어색한 연말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닐 테니, 익숙해져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