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로 입구 편의점이 행복한 날은 역시 주말이다. 월화수목금요일 매출을 모두 합쳐봤자 토요일 일요일 이틀만 못하다. 선영은 주말을 위해 평일을 살고, 주말 때문에 평일을 버틴다. 그렇게 기대하던 주말에 비가 내리면 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욕설을 쏟아붓고, 그렇게 서너 주 연속으로 주말에 비가 내리면 하늘에 대고 하소연한다. “주여, 나한테 왜 그러시나이까. 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욕을 하던 날이었다. 선영이 ‘그년’을 처음 만난 날. 아니, 처음은 결코 아니지. 그년을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날.
비가 내린다고 하더니 흐물흐물 내릴 듯 말 듯 먹구름만 잔뜩 낀 토요일이었다. 사실 이런 날이 등산하기에는 딱 좋은 날이다. 따가운 햇살도 없지, 미세먼지 없지, 덥지 않고 선선하지……. 애초부터 그렇게 일기예보에 “내일 날씨는 흐리고 선선하겠습니다. 비 올 확률은 0%입니다”, 이렇게 공표한 날이었으면 선영에겐 대박이다. 등산객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그런데 기상청 동무들이 “비가 내릴 예정”이라 못 박았던 날,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만 꾸물꾸물 꿀럭거리면, 선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어차피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대박’의 날씨가 펼쳐지는 꼬락서니란, 수술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인데 때마침 평생에 한 번 가볼까 말까 한 최고급 뷔페식당에 초대받아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 허탈함과도 같다. 으아아아아악, 다 부셔버릴 거야!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연신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선영은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신, 너는 죽었어!
‘그년’은 그날 왔다. 하필이면 딱 그런 날. 비 올 확률 80%였던가, 손님은커녕 평소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길냥이 패밀리조차 보이지 않고 언덕 위 편의점에 황량하게 정적만 감돌던 토요일 오후 그날, 오전 장사는 완전히 종 치고 점심 지날 무렵에는 모든 기대를 접고 카운터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유튜브 동영상이나 보고 있을 때, 띵동, 차가운 차임벨 소리와 함께 남녀 한 쌍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 오지 않을까?” 남자가 말했다.
“아냐, 자기야. 이런 날이 더 등산하기 좋다니까.” 여자가 잔뜩 콧소리를 섞어 말한다. “안 와. 걱정 마. 사람도 없고, 좋겠네 뭐.”
남자는 걱정하고 여자는 태연하다.
“어쨌든 빨리 올라갔다 내려와야겠네.”
“걱정말래도. 금바위는 1시간이면 올라가. 그동안 뭔 일이야 있겠어? 후딱 올라갔다 내려와서 밥 먹자.”
“생수만 사면 되겠지?”
“응. 그래그래. 아, 사탕도 한 봉지 사자.”
여자는 벽면 진열대에 걸려있는 청포도 사탕을 한 봉지 집어 들었다. 남자가 주섬주섬 지갑을 꺼낸다. 부부가 아니다, 라는데 내 오른쪽 팔목을 걸겠다, 라고 선영은 생각했다.
“얼마에요?”
“3천7백 원입니다.”
600원짜리 생수 3병을 2+1으로 사고 2,500원짜리 사탕 한 봉지, 그래서 3,700원. 남자는 한참 휴대폰 화면을 토닥이더니 통신사 할인까지 받았다. 최종 결제금액 3,330원. 그리고 포인트 적립까지. 좀생이 같으니! 그런데 옆에 있던 여자는 또 굳이 그것을 확인해 보겠다는 듯, 금전출납기 화면을 들여다보려고 슬쩍 선글라스를 치켜올린다. 그때 여자와 선영의 눈이 슬쩍 마주쳤다.
어디서 봤더라?
단 1초 남짓한 시선 접촉이었지만 여자가 움찔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남자가 계산을 치르는 사이, 여자가 재빨리 명찰을 살펴보는 것을 선영은 감지했다. 그래, 우리는 분명 과거에 무슨 ‘관계’가 있던 사이다! 이럴 때마다 선영은 억울하다. 내가 누군지 너는 이렇게 금세 확인하는데, 나는 네가 누구인지 한참 기억을 쥐어짜야 하다니. 이름표는 불공정하다.
여자가 나가고 이삼 분쯤 지나서야 선영은 떠올랐다.
“선영이! 그래, 선영이!”
중3 때 같은 반 선영이.
은광동에서 태어나 은광동에서 내내 자랐으니 손님 가운데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특히 명절에는 초중고등학교 동창회를 치르듯 편의점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짝꿍 성준이도 편의점에서 재회했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딸내미 손 잡고 와서는 “편의점 사장님이 아빠 친구야”하면서 헤벌죽 웃더라. 네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엄마 따라 여자 목욕탕에 다녔다는 사실을 예쁜 딸은 알려나? 이렇게 편의점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 그리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선영이 ‘그년’도 그런 많은 친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년’, 고약한 그년과는 조금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일단 이름부터 같잖아.
일선영, 이선영, 삼선영.
아무리 선영이란 이름이 흔하다지만, 그래서 한 반에 선영이 두 명 있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 반에 선영이 세 명이나 몰릴 확률은 얼마나 될까? 학급 배정 담당했던 선생님이 익살스레 장난이라도 친 것 같았다.
공부 잘하는 선영이 있고, 그와 상극처럼 공부 못하는 선영이 있었다. 그리고 중간쯤 되는 선영이 있었다. 아담하게 작으면서 암팡진 선영이 있고, 꺽다리처럼 홀쭉 키만 큰 선영이 있었다. 그리고 중간쯤 되는 선영이 있었다. 가나다 순으로 번호를 매겼는데, 앞번호 공선영이 있고, 뒷번호 황선영이 있었다. 중간 선영의 성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박선영? 최선영? 장선영?
아무튼 그래서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이 “선영이 불러와라”하면 어떤 선영을 불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는데, 어차피 둘 중 하나이긴 했다. 공부 잘하는 일선영이나 공부와는 정반대의 일로만 교무실에 불러갔던 나, 삼선영이거나. 이선영이 교무실에 갈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마주친 얘는 이선영. 키도 중간, 성적도 중간, 번호도 중간이었던, 중간 선영.
그나저나 이선영, 중간 선영, 그년, 정말 성이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김선영? 나선영? 이선영은 분명 아니었다. 그년, 참.
선영이 선영을 그년, 그년, 하면서 괘씸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앙큼한 그년이 학년 말에 갑자기 전학 가면서 선영의 온갖 패악질을 학생과에 찾아가 모두 고발하고 간 것이다. 어디서 몰래 담배 피우는지, 어떻게 애들을 괴롭히는지, 누구랑 어울려 무슨 나쁜 짓을 했는지……. ‘도대체 어떤 년이 고자질한 거야?’하면서 패거리끼리 씩씩거렸는데 이선영이 전학 간 다음 날 벌어진 일이니 모두 이선영의 짓이라 결론 내렸다. 찾아가 죽인다고 길길이 날뛰던 애도 있었는데 선영이 말렸다. 강원도였나, 부산이었나, 아무튼 아주 멀리 이사하는 바람에 찾아가기 어려웠다. 20년 넘게 지난 일이라 피식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갈려면 조용히 갈 것이지, 허 참, 그년 참.
하여간 선영도 참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보내긴 했다. 초등학교 때는 ‘선영슈퍼 선영이’라고 아이들에게 부러움 반 놀림 반 관심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은광여중 황선영, 은광여고 황선영 하면 은광, 창신, 대진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날라리로 통했다. 중고등학교를 제 때에 졸업한 것만 하여도 과연 하늘이 도운 일이다.
그런저런 생각이 잠겨 있을 때 편의점 안에 벨소리가 울렸다.
선영은 카운터 아래 놓아둔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거기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다.
어디서 울리는 걸까?
은회색 휴대폰 하나가 사탕 진열대 옆에서 벨소리와 함께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갈려면 조용히 갈 것이지, 허 참, 그년 참.
여자가 돌아온 시각은 서너 시간 뒤였다. 유월에 날이 저무려면 아직 멀었는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뿜어낼 듯 사위가 온통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띠-잉 동. 보라색 집업 반팔티에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여자가 등산스틱을 달락거리며 편의점에 홀로 들어왔다.
올 것이 왔군.
선영은 못 본 척, 보고 있던 휴대폰 동영상에서 일부러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여자는 사탕 진열대 쪽으로 가서 인근을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혹시 여기 휴대폰 하나 없었나요?”
선영은 여전히 휴대폰 동영상을 바라보면서, 금전출납기 옆에 보관하던 은회색 휴대폰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쓰윽 여자 쪽으로 내밀었다. 여자가 밝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짚으려는 순간, 선영은 공짜로 내줄 수는 없다는 듯 휴대폰을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은광여중 나오지 않으셨나요?”
여자는 놀라는 표정 없이 대답한다.
“아니요.”
단호한 부정에 선영은 속으로 놀란다. 잘못 본 건가?
여자가 말했다. “은광여중…… 다니기는 했는데 나오지는 않았어요.”
“맞지? 너 선영이 맞지?” 선영이 선영을 가리키며 웃었다. 선영이 선영에게 전한 환영의 첫인사말은 이랬다. “고얀 년, 하나도 안 변했네.”
선영과 선영은 편의점 앞 파라솔에 나란히 마주 앉는다.
“야 근데 너 무슨 선영이었더라?” 삼선영이 묻는다.
“나? 박선영!” 이선생이 대답한다.
“아…….”
왜? 라는 표정으로 이선영이 삼선영을 바라보자 삼선영이 말한다. “나는 네가 ‘이선영’이라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