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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달호 Aug 30. 2019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편의점 이야기×에세이〉연재 09

흐릿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까매지더니 투둑 투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합니다. 얼씨구 좋구나! 번개처럼 창고에 들어가 우산 진열대를 꺼내놓습니다. 오후 5시, 퇴근 무렵 내리는 비는 저처럼 회사 건물 안에서 편의점을 하는 장사치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상여금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좋으시겠습니다.” 우산을 사던 손님이 이렇게 말을 건네자 “손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저희는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행운과도 같지요” 하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 저희 가게 출입문 앞에서 멀뚱히 제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왜 저러실까? 걱정되었습니다.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너무 솔직히 대답한 건가?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셨던 것일까? 오만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우산을 사가는 손님이 조금 뜸해졌을 때, 그 손님이 카운터로 다가와 제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혹시…… 고려중학교 나오지 않으셨나요?” 중학교 동창 태희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지금은 서울 한구석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고향 친구나 예전에 알았던 사람을 우연히 손님으로 만나게 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후 5시에 비가 내릴 확률보다는 분명 희귀할 것입니다. 지난 7년간 편의점을 운영하며 그런 일을 세 번 겪었습니다.


지난겨울, 저희 편의점이 위치한 건물에 새로운 회사가 하나 입주했습니다. 그런 날 편의점에는 실내화, 멀티탭, 방향제, 구강용품 같은 것이 갑작스레 많이 팔려나갑니다. 평소에는 제품에 얹은 먼지를 닦아내며 “너희들은 언제 팔려갈 거니?” 걱정했던 아이들이, 그런 날 기쁘게 손 흔들며 편의점을 떠납니다. ‘그 손님’도 그렇게, 칫솔을 사러 왔던 숱한 손님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계산을 하면서 손님 얼굴을 힐끔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도통 생각은 나지 않지만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다음에 그 손님이 우리 편의점을 다시 찾았을 때, 용기 내어 넌지시 물었습니다. “혹시…… 광주에서 살지 않으셨나요?” 손님이 물끄러미 제 명찰을 보더니 “아니, 이게 누구야!” 하면서 반가워합니다. (제 이름이 꽤 특이하긴 하지요.) 고교 동창 동준이는 또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 삶에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침마다 컵라면을 사러 오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는 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탈북자였습니다. 이런저런 차별이 걱정돼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주위에 숨기는 탈북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럴 수 있는데 ‘너 누구지?’하고 불쑥 물을 수 없더군요. 그는 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곤 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기회가 왔습니다. 그 손님이 혼자 왔길래 대뜸 “수철아!”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수철이는 환하게 웃으며 “왜 이제야 아는 척하는 거예요” 하고는,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알고 보니 수철이는 제가 편의점을 하고 있단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할까 봐 아는 척하지 않았고, 일부러 멀리 있는 편의점까지 가기도 했답니다. 우린 둘 다 못 말리는 소심쟁이들이었던 겁니다.


“수철아 한국에서 편의점 점주라는 직업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그러자 수철이도 “형,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도 숨길 일이 아니죠.” 하며 넉살 좋게 웃었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술 동무가 되었고, 수철이는 아침마다 컵라면 먹으러 우리 편의점에 오다가 지금은 발령이 나서 지방에 있습니다. 참새 방앗간 들르듯 시시 때때 찾아오던 녀석이 보이질 않으니 요즘 하루가 온통 허전하기만 하군요.      



     

편의점은 관계의 폭은 넓―지만 관계의 깊이는 얕은 곳입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손님을 상대하지만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흘려보내는 손님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군중 속의 고독 가운데 우리는 종종 인연의 끈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젠 손님이 낯익다 싶으면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하고 직구를 던지듯 묻습니다. 손님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면 ‘아차 아닌가 보구나’ 싶어 “그래도 우리는 대한민국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하면서 저만의 아재 멘트를 날립니다. 어쨌든 그렇게 말이라도 한번 붙여본 것 또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편의점을 운영하며,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가 없단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언제 누구를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늘 조심하며 죄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선영끼리 왜 그래〉는 편의점에서 옛 친구를 만날 때마다 떠올렸던 이야기 소재입니다. 제가 해후한 친구들은 물론 좋은 모습으로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 친구들이지만 혹시라도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 말입니다.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들 하지만, 때로 세월로만 덮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과 어떻게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역지사지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나도 선영이고 너도 선영이듯, ‘네가 나일 수 있고, 내가 너일 수 있는’ 세상사에 대해 생각합니다. 생각할수록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인간사 얘깃거리 이면에는 우리가 선과 악으로 거칠게 재단할 수만은 없는 사연과 관계의 실타래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한 뼘 한 뼘 깨달아갑니다. 거기에 귀 기울이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다고 스스로 돌아보곤 합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다음 주에는 〈편의점 이야기×에세이〉 제3화 "기억 속에 잠깐"이 연재됩니다.)



― 〈편의점 이야기×에세이〉는 매주 화요일, 금요일 브런치를 통해 연재합니다.

―  그림은 대학 새내기인 딸이 그렸습니다. 글과 그림의 저작권을 존중해주세요.

―  출간 관련 문의 :  runtokorea@gmail.com      


[지난 연재]

■  프롤로그 : 딱 편의점만 한 이야기

■  패니잼 고 씨 _ 1화

■  패니잼 고 씨 _ 2화

■  패니잼 고 씨 _ 3화

새우탕에 소고기가 들어가는 것처럼

선영끼리 왜 그래 _ 1화 

선영끼리 왜 그래 _ 2화

선영끼리 왜 그래 _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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