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Evans
피아노를 치고 있는 누군가에게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꼽아달라고 한다면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한 남성을 떠올릴 것이다. 반듯하게 빗은 올백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담배를 문채 피아노를 치는 빌 에반스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뮤지션이다.
아마 재즈를 모르는, 음악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라 해도 어디에선가 빌 에반스의 이름을 듣거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Waltz For Debby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미 빌 에반스의 음악은 재즈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있다. 이런 빌 에반스의 아름다운 음악의 기반에는 클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빌 에반스는 낭만주의 성향이 굉장히 강하다. 빌 에반스를 부르는 재즈계의 쇼팽이라는 별명이 그 사실을 반증해준다. 빌 에반스는 라벨과 드뷔시, 라흐마니노프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클래식과 고전 화성에 조예가 깊다. 아마 재즈 주자으로는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기에 클래시컬한 정서를 재즈에 담아내는 데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빌 에반스의 음악은 재즈 입문 자부터 재즈 마니아들을 아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재즈 앨범 중 손꼽히는 절대적인 명반이 있는데 바로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다. 이 앨범은 당시 유행하던 하드밥의 한계를 느낀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의 새로운 출구로서 제시한 모달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앨범이다. 이 전의 재즈는 코드를 중심으로 즉흥연주를 진행하는 코달 재즈라고 할 수 있다.
재즈 화성학을 깊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를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설명을 하자면, 기존의 음계는 장조와 단조로 나눴다. '레'를 기준음으로 가정할 경우, 장조일 경우엔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레)가 된다. 즉 장조의 기본 구조인 3,4번과 7,8번 음간의 거리는 항상 반음이 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모드에선 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음계를 나열했을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반음을 인정해줌으로 2,3음과 6,7음이 반음이 되는 dorian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그래서 D dorian은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레)가 된다. 도리안뿐만이 아니라 아이오니안, 믹솔리디안, 리디안, 프리지안 등 총 7개의 모드가 더 있다. 이 7개의 모드가 재즈에 도입되면서 즉흥연주의 표현방법이 훨씬 더 무궁무진해지게 된다.
재즈의 본질은 "자유"다. 재즈는 탄생부터, 언젠가 잊혀질 마지막까지 자유를 연주하는, 자유를 추구하는 음악으로써 기억될 것이다. 그렇기에 재즈는 더욱 규칙과 제약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화성학이란 건 기본적으로 음의 조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악은 음을 더 조화롭게 만드는 행위이다. 조화롭지 않은 음의 배치는 한낱 소음에 불과하다.
재즈의 본질과 음악의 본질이 충돌하는 이런 아이러니함 안에서 재즈는 항상 불안정했고 끊임없이 변화와 실패를 겪었다. 아마 앞으로도 완벽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빌 에반스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는 코드 중심의 즉흥연주에서 모드 중심의 즉흥연주라는 방법으로 표현의 한계를 허물어줌으로 재즈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코드에서 선율로,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이 모드(Mode)를 재즈에 응용을 하려면 고전 화성에 해박해야 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빌 에반스는 고전 화성을 꿰뚫고 있는 독보적인 뮤지션이었고, 그렇기에 마일스는 빌 에반스에게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Kind Of Blue]라는 앨범이 탄생될 수 있었다. 이 일로 아직은 신인에 불과했던 빌 에반스는 마일스의 눈에 들어 마일스의 6중주에 들어가게 되고 본격적으로 재즈 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급부상하게 된다.
빌 에반스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두 개의 앨범이 있는데 바로 조카를 위해 직접 쓴 "Waltz For Debby"와 빌리지 뱅가드라는 재즈클럽에서 열린 라이브 실황 앨범인"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다. 이 앨범들은 재즈 피아노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며 [Kind of blue]와 같이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평가받는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녹음된 앨범이다.
빌 에반스의 황금기엔 항시 거론되는 두 명의 연주자가 있는데 바로 스콧 라파로와 폴 모티앙이다. 에반스 - 라파로 - 모티앙 트리오는 인터플레이의 교과서와도 같은 전설적인 트리오로 평가를 받는데, 인터플레이란 게 뭐냐면 사전적 의미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여러 명의 연주자가 호흡이 잘 맞아 상호 영향을 미치며 긴장감을 높여가면서 수준 높은 연주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 트리오는 리드 악기와 리듬악기를 구분 지어 솔로 할 때 컴핑 하며 음을 최대한 줄여 솔로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는 식의 연주에서 벗어나 솔로 연주 중에도 치고 들어오면서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획기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이런 연주의 정점에 있을 때 녹음한 앨범이 바로 Waltz For Dabby와 뱅가드 라이브 실황 앨범인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이다. 하지만 이 앨범이 녹음되고 불과 10일이 지난 후, 이 트리오는 스콧 라파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게 되며 원치 않는 해체를 맞이하게 된다.
[왼쪽부터 스콧 라파로, 빌 에반스, 폴 모티앙]
빌 에반스의 음악을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듯, 에반스는 내성적이다. 말도 별로 없고 깊은 생각에 자주 빠지며 철학 책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이런 점은 하나의 음을 쳐서 그 음의 잔상을 이용해 하프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빌 에반스의 연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런 에반스의 연주를 두고 재즈 특유의 스윙감이 없어 내성적인 연주자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빌 에반스만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내성적인 성향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성적이고 예민한 감성이 빌 에반스의 음악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을지는 몰라도 그의 인생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내 주지는 못했다.
빌 에반스의 인생은 사실 굉장히 굴곡지고 비극적이다. 나중에 포스팅할 대표적인 우울한 감성의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와 빌리 홀리데이와 비견될 정도로.
빌 에반스가 무너지게 된 큰 3가지 사건이 있는데, 어쩌면 아내 그 이상의 의미였을 오랜 연인, 엘레인의 지하철 투신자살, 어린 시절을 서로 의지하며 버텨왔던 친형 해리 에반스의 자살,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파트너였던 스콧 라파로의 사망은 빌 에반스에게서 삶의 의미를 앗아갔다. 어느 하나 자신에게 소중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테다. 해리 에반스와 스콧 라파로의 죽음은 빌 에반스로써는 손을 쓸 도리가 없었지만, 엘레인의 투신자살 같은 경우는 자신이 엘레인이 아닌 다른 이성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에 죄의식을 떨쳐내지 못한 빌 에반스의 고백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크 충격이 더욱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빌 에반스는 쳇 베이커처럼 우울감을 극복할 만큼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극복하고 마약을 끊은 기간도 있긴 했지만 악재가 터질 때마다 에반스가 의지해왔던 헤로인과 코카인은 빌 에반스를 주사 통증으로 한 손으로만 연주하는 일도 빈번하게 생기게 할 정도로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에반스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세월의 힘을 입어 빌 에반스의 음악은 한층 더 원숙해지며 아름다워졌지만. 오랜 연인 엘레인의 투신자살과 라파로의 죽음 이후로는 빌 에반스의 음악에서 이전과 같은 생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친형 해리 에반스의 자살 소식을 들은 이후 빌 에반스는 계속 복용해오던 만성 간염약을 끊고, 계속된 헤로인 중독으로 1980년, 세상을 등지게 된다.
빌 에반스와 쳇 베이커가 다른 점은, 쳇 베이커는 그 우울감을 음악으로 표출하였고 빌 에반스는 음악으로 낭만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울을 노래하건, 낭만을 노래하건, 결국 둘 다 우울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한 명은 암스테르담의 투신자살로, 한 명은 복용하던 약을 스스로 끊으며 죽음을 앞당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쳇의 음악이 한없이 우울하고 슬프고 애잔하다면 빌 에반스의 음악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빛난다. 하지만 빌 에반스의 음악은 아름다운 음악 곳곳에 처연함과 슬픔이 담겨있다.
빌 에반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희대의 역작, 빌 에반스의 정수가 담겨있다.
1958년에 녹음한 곡으로 Some Other Time의 첫 번째 곡을 가져와 아무도 없는 뉴욕의 거리를 상상하며 즉흥적으로 연주한 곡이라고 한다. 눈 감고 빌 에반스가 살던 당시의 뉴욕을 상상하면서 들어보면 마음이 세상 편해지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