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하프 마라톤 후기
인생 처음으로 하프 마라톤을 신청해 두고, 방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생각했다. ‘10km도 아니고 20km도 아니고, 21.0975km를 취미 삼아 뛰는 사람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그저 먼 길을 뛰어갔다 돌아오는 스포츠라니. 심지어 이걸 좋아해서 매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니.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대회 며칠 전, 배번표와 함께 배송 온 대회 티셔츠를 자정이 넘은 시간에 얼른 입어보라고 조르는 통화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받아들였다. 그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는 이들 중 한 명이 나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
애초에 K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라톤은커녕 러닝에 취미를 붙일 일조차 없었을 터였다. K는 내가 살면서 처음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달리는 게 당연하고, 자기만의 운동 목표를 달성하면 신나서 자랑하는 사람. 솔직히 말해 러닝은 하나도 재미가 없어 보였지만, 그걸 재미있어하는 K는 재미있었다. 나는 선뜻 달리기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나도 좋아해보고 싶어서.
“그거 알아? 딱 1년 전 오늘이 내가 K한테 처음으로 차인 날이다?”
하프 마라톤의 시작까지 10분이 남았을 때였다. K는 눈을 치켜뜨며 얘가 또, 하는 얼굴을 했다. 할 말 있어? 같은 표정으로 답례를 해주고는 짧게 웃었다. 나를 열 달씩이나 받아주지 않은 K를 놀리는 건 우리 사이에 자주 오가는 대화였다. 이 정도는 감당해야지. 내가 열심히 달렸던 건 전부 너 때문인데. 차인 뒤로 다시 연락할 용기를 내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말 붙일 핑계를 찾기 위해서, 러닝에 관해 설명할 때면 약간 달라지는 네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처음으로 차였을 때, K는 내가 좋지 않은 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렇다면 시간을 좀 더 가져보자고 말했다. 그 시간이 한 달, 세 달, 반 년이 훌쩍 지나도 여전히 ‘좀 더’ 필요했을 때, K의 권유로 첫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이제 그만 좋아하겠다는 결심을 열 번쯤 했을 때였다. 좋은 친구가 될 테니 너도 더 이상 여지주지 말라는 선언까지 한 뒤였다. 주변의 모두가 이미 야, 글렀다, 빨리 마음 접고 딴 사람 찾아봐, 하고 말해줄 때였다. 나조차도 그랬다. K와의 연애는 다음 생에서나 하겠구나 싶었다.
첫 마라톤은 10km, 목표는 53분.
K가 처음으로 10km 마라톤 대회에 나갔을 때의 기록이라고 했다. 1시간 안에만 들어와도 잘한 거라는 K에게는 목표를 밝히지 않았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 밑에서 뛰는 동안 몇 번이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생각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뛰었다. 잠시 뜀을 멈추고 걷고 싶어질 때마다 K를 떠올렸다. 그러면 걸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부끄럽고 싶지 않았으니까. 53분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자 헛웃음이 터졌다. 아, 이래서 무슨 친구를 해. 너한테 “와, 뭐야?”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 이 아침에 10km를 뛰잖아. 한 시간을 뛰는 내내 네 생각만 하잖아, 내가.
여름이 전부 끝나기 전에 K는 결국 내 손을 잡았다. 처음 고백했던 날로부터 9달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K의 옆, 하프 마라톤의 출발선 앞에 서 있었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21.0975km의 앞에. 간만의 마라톤이 신나 죽겠다는 K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나는 여전히 이게 뭐가 그렇게까지 신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게 된 것도 하나 있었다. 모두가 안 될 거라고 했던 연애. 너와 나조차 될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던 연애. 그 불확실한 관계를 열 달씩이나 붙들고 있었던 이유가 뭐였는지.
K는 오랜만의 마라톤에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오로지 내 페이스에 맞춰 뛰었다. 가끔은 등을 밀어주고, 잠깐 걷자고 말해주고, 또 가끔은 큰 목소리로 나를 격려하면서. 제대로 뛰지 못해서 아쉽지 않냐고 묻는 내 말에 오늘은 함께 뛰기 위해 나온 거라고 답하면서.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3km 정도는 네 맘대로 양껏 달리라는 나를 돌아보며 K가 말했다.
“결승점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쏜살같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 섞인 웃음이 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뛰어보는 거리. 골인 지점은 보이지도 않고, 같이 뛰던 사람들도 다 없어지고, 솔직히 그만두고 집에나 가고 싶은데, 나는 내가 끝까지 포기는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발바닥부터 종아리, 무릎, 허벅지, 고관절까지 안 아픈 곳이 없어도, 그래도. 깊은 숨을 한 번 더 뱉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결말을 알 수 없는 길을 열 달 내도록 걷게 했던 이유가 결승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잡아 눌렀다. 아, 나 매번 이것 때문에 뛰었나 봐. 내 모든 달리기의 끝에 네가 있기를 바라서.
*
좋아하는 일 하나를 하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 세 개를 해야만 한대. 그건 어느 날엔가 K가 내게 말해주었던 문장이었다. 하프 마라톤을 완주하고 돌아가는 길에 K는 그 말을 다시 꺼냈다. 나는 싫어하는 일 하나를 벌써 해낸 셈이라고 했다. 함께 뛰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희한한 방식으로 전하는 K에게 나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바보야, 이건 좋아하는 일이야.
너를 좋아하는 일 하나를 하기 위해서, 나는 이미 싫은 순간을 서른세 개쯤 흘려보냈는데. 혼자 심란해하던 밤과 가끔은 울고 싶어졌던 그 순간들이 이젠 싫지조차 않았다. 그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K가 들려준 말은 순서가 틀린 셈이었다. 싫어하는 일을 세 개 해내야만 좋아하는 일을 하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일 세 개를 버티는 거였다.
벌써부터 다음 마라톤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의 옆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있잖아, K. 싫어하던 일 세 개를 좋아하게끔 만들고야 마는 거, 그게 사랑인 것 같아.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아주 긴 길을, 내가 끝내 뛰고야 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