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깅스 컬러와 발전 가능성의 상관관계

영화 <그린북>을 보고서

by DD
영화 <그린북> 포스터

* 영화 내용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내 루틴은 대략 이렇다. 운동을 한다 - 스타벅스에 간다. 아니면 스타벅스에 간다 - 운동을 한다. 사이렌 오더 히스토리를 보니 9일 연속으로 집 앞 5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 출근했다. 긴 직사각형 테이블에서 원형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것 외엔 늘 같은 음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3시간쯤 앉아 있는다. 굳이 가는 목적이 있냐면, 물론! 남들 보기엔 순전히 딴짓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인스타에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시간)마다 사진을 업로드했고, 영어 공부를 했고, 책을 읽었다. 그걸 하려면 스타벅스만 한 곳이 없다. 문제는 0순위로 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건데, 나는 그걸 인지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영화에 대한 인상이 휘발되기 전에 감상문을 쓰자. 그런데 글이 잘 떠오르지, 아니 애초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지난 여름 로마에서 인종차별도 당해보고, 요즘 꽂혀 있는 예술가 둘은 유색인종인데도. 그럼 뭐라도 할 말이 생겨야 아니 줄줄 나올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폰으로 괜히 미국 남북전쟁 배경이나 검색해보고, 장 미쉘 바스키아 작품을 한동안 봤다. 그러니까 스벅에서 감상문과 관련된 일을 아예 안 한건 아니었다. 나는 무슨 계시를 기다리는 수도승처럼 아메리카노를 떠놓고 기도드리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가끔 아메리카노로 목도 축이면서. 그러다 오늘 입은 레깅스 컬러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그린북은 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성공한 흑인 피아니스트(셜리)와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기사(발레롱가)의 우정을 다룬다. 발레롱가는 셜리의 남부 투어 공연을 위한 기사겸 매니저로 고용되어 8주 동안 동거동락한다. 주류의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찐 ‘백인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셜리 그리고 겨우 풀칠만 하고 사는 백인인 발레롱가. 시대적 통념 같은 흑인-가난과 백인-부유의 조합을 뒤바꿔 만든 아이러니가 서로의 컬러를 넘어 공감에 이르게 한다. 영화 속엔 꽤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나는 발레롱가랑 셜리가 차에서 치킨을 나눠먹는 게 제일 좋았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셜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크 푸드를 먹는 장면에서 나는 셜리가 모종의 해방감과 삶의 또 다른 재미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지만, 우리는 가끔 형식에 압도되어 맛을, 인생의 맛, 켄터키 치킨을 즐기지 못 한다!

영화 <그린북> 한 장면

둘은 시종 옥신각신거리는데 이 영화의 꿀잼 포인트가 이런 둘의 티키타카다.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떠벌이 발레롱가와 지적이면서 차분한 셜리의 대화를 듣노라면 저런 대화가 가능은 한가 싶기도 하다. 왜 그렇지 않은가, 서로의 지적 수준이 다르다는 직관 아니 대놓고 말해서 학벌이 다르면 우린 서로가 다른 급임을 느끼고 은근히 내세우고 그리고 ‘바리케이드’를 처버린다. 우리는 발레롱가가 말하듯이 같은 ’종’들끼리 어울리고 싶어 한다. 뭔가 그럼 쿨해보인다. 그런데 한국에서 학벌 이야기를 하려면 진짜 끝이 없다. 그러니 이건 이쯤 해두기로.

영화 제목 그린북은 흑인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를 말한다. 말이 안내서지, 흑인들이 이용해도 되는 곳을 말한다. 그런데 ‘해도 된다’는 ‘할 수 있다’는 말과는 다르다. ‘해도 된다’는 허락을 뜻한다. 그리고 허락은 허락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허락하는 사람은 허락받는 사람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다. 셜리와 당시 유색인종은 일상을 영위하고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 허락을 구해야했다. 셜리는 뉴욕에서 취할 수 있는 쉬운 성공을 뒤로한 채, 발레롱가와 그린북을 들고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로 투어한다. 셜리에겐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당신은 해도 되는 것만 해도 되는가??)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면, 나는 스벅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아이폰 메모장에 글을 쓰고 있어서 분명 모양은 안 날 거다. 그러니까 쌩얼의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들고 앉아서 시종 뭘 하는데, 그 여자 앞 테이블이 흔들린다 다리도 떤다. 맙소사, 심지어 이여자 닥터마틴 신고 올리브색 레깅스를 신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완전 쿨한 일을 하고 있다. 글쓰기. 내 레깅스 컬러는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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