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단지 세상의 끝>을 보고서
가끔 엄마를 보면서 당신이 내 어머니가 아니었음 우리 관계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당신이 50대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30대라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고. 같은 지붕 아래 비바람을 피하며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의 가족들의 모습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부모와 자식, 동생과 누나라는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꽤 단편적인 것 같다. 우린 각자의 관계 속에서 역할을 정해두고 그 사람의 행동을 그 안에서 판단한다. 그래서 이따금 정서적 교류나 문화적 이해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면 우린, 그러니까 나와 부모님은 공감에 이르는데 실패한다. 이게 영화 속 루이가 말한 세상의 끝 같은 걸까. 한국과 아르헨티나 정도의 거리가 이보다 가까울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 거리감은 분명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느끼시리라. 그런 거리감이 섭섭함으로 느껴져 싸우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에서는 누군가와 침 튀기며 싸울 일이 (특히 지금처럼 코로나 시국엔) 그다지 많지 않은데, 어째 가족들 앞에선 완전히 민낯이 되어 별거 아닌 일에 그렇게 열을 올리며 싸우는 걸까. 가족들이라면 나를 이해해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래도 된다는 생각일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나를 사랑한다는 그런 전제가 밑바탕에 있는 것. 질투심과 자격지심으로 동생을 몰아붙이던 앙트완이 흘린 눈물도 본인 스스로 자각하지도 못 했던 사랑이었다. 물론 루이도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지만 생일이면 잊지 않고 엽서를 보냈고.
그래서 초면인 사람 혹은 생면부지의 사람과 대화 속 위로라는 것도 뜯어보면 대화 상대방과 함께한 시간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이야기 속 상황에 대한 판단만 하지 나라는 사람을 둘러싼 총괄적 이해는 결여되어 있다. 나에 대한 반쪽짜리 이해로 어설프게 위로하기보단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오가는 가벼운 대화가 진실함은 어떨지 몰라도 신경은 덜 쓰인다. 영화 속 루이와 카트린의 교감도 그럴게 아닐까.
나는 늘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는 편이다.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이 피상적이다고? 죽음에 대상자를 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부모님의 죽음. 엄마 아빠의 영원한 부재. 내가 아르헨티나어를 배우길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