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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수있지 Jan 17. 2024

엄마집에서 2주 살기

엄마아빠랑 같이 먹는 밥이 좋긴 좋더군요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우리 집은 내놓은 지 3개월 만에 집이 나갔다. 

오전에 어떤 아이 엄마에게 매도하였고, 그날 오후 마음에 드는 집을 매수하였다. 

하다못해 USB포트도 2주 동안 공부를 하고 사는 우리 남편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을 한눈에 알아본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집을 산 건 좋은 선택이었는데 (아직까지는)

한 가지 꼬인 건 날짜였다. 

우리가 집을 빼주고 새집으로 들어가기까지 2주 반의 공백이 생겼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친정과 시댁은 서울과 경기도에 있어서 우리가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실 수 있었고, 

남편은 서울에 있는 시댁에서 나와 아이는 경기도에 있는 친정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출근길 긴급 상황에 대한 대처가 중요한 자와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고 싶은 자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2주 살기를 하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통근했던 그 거리를 출산 후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비루한 이유를 대며 

한 달에 한 번도 얼굴 보기 힘든 딸이 

보석 같은 손녀와 함께 지낸다고 하니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어느 날은 밤에 전화가 와서 카드번호를 부르시며 얼른 홈쇼핑의 탄소매트를 사라고 하셨다. 너희가 와서 쓸게 필요하다며 수선이다. 우리 집엔 이미 2개의 매트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우리와 함께할 여행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이셨을까. 

당연히 나도 아이와 함께 나의 동네에서, 내 친척들, 내 친구들과 맘껏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기대되는 마음으로 그득했다. 

남편은 아이가 아빠를 찾으며 울진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묻어있었다. 나는 봤다. 

다행히 아이는 잘 적응했다. 

엄마가 있는 곳이 아이에게는 그냥 집인 듯했고

남편은 주말마다 아이와 나를 보기 위해 왔다. 


오히려 처음 적응이 힘들었던 건 나였다. 

이곳이 예전엔 우리 집이었는데, 

더 이상 여긴 나의 공간인 ‘우리 집’은 아니었다.

‘엄마집’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자란 '우리 집‘보다 지금의 '우리 집'이 더 편해진 건.

그렇지만 곧 나도 처음의 어색함은 무색하게 금방 적응했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는 집이었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아침 일찍 출근하신다. 

그리고는 초저녁쯤 들어오셔서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챙겨 

두 분이 좋아하는 티비를 보며 두런두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투닥투닥하기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이다. 

손녀가 유독 보고 싶을 때면 영상통화를 걸어 어설픈 발레동작에 반응을 보여주시는 것이 평일의 다였다. 

이제 그 시간 안에 우리도 있었다. 

초저녁에 들어오시면 이젠 주부가 된 딸이 보글보글 저녁메뉴를 준비하고 있고 

쪼르르 달려와 “할부지~할머니~”하면서 안기는 손녀가 있다. 

저녁을 먹으면서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너도 그랬다며 딸에게 핀잔을 주고 

30년 만에 장난감으로 아이와 놀아주는 그런 저녁시간이 되었다. 

아빠가 그런 말을 하셨다

퇴근하면 저 쪼그만 애를 볼 생각을 하면서 출근하신다고.


우리의 2주 동안에는 크리스마스도 있었고, 

아빠의 생신도 있었고, 

새해의 첫날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케이크를 함께 불었고 

아빠의 생신에는 딸이 한 상 차리고, 손녀가 목이 터져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12월 31일의 밤에는 셋이 술을 한잔 기울이며 이게 몇 년 만이냐며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 시간이 얼마나 좋았던지 나는 매년 연말에는 이렇게 함께하자는 공수표를 남발했고 ,

아빠는 그땐 2주 말고 이틀만 있다 가라는 농담을 하셨다. (사실 농담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연말을 각자의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보내자는 남편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연말인데.. 이 남편은 나랑 아이가 그립지 않나 까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건 친정부모님과 나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고, 서운하실 시댁 부모님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할 줄도 알고 참 고마운 남편이다.   



당연하게도 엄마집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날은 남편이 밤에 데리러 왔다. 

그래서 저녁까지 먹고 올라왔는데 메뉴는 무조건 양념갈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니까

우리 엄마는 나를 무조건 많이 먹여서 보내야 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아이의 장난감으로 어수선하던 집이 세상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엄마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청소를 하고 문이 닫히지도 않는 짐가방을 현관 근처로 옮기셨다. 

그 모습을 보며 깔깔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다행이었다. 

우리로 채워졌던 공간이 엄마아빠에게 구멍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남편이 오고 짐을 한가득 실은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엄마의 눈이 반짝인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괜찮을 리가 없지

심장이 내려앉는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데도 속상하다. 

아이의 방학 때마다 오겠노라고, 

우리 이제 여행도 많이 가자고, 다음에 여행 가자고 할 때 시간 없다고 하시면 안 된다고 

나에게 하는 다짐 같은 말을 자꾸 내뱉는다. 



함께 지낸 시간 동안,

3kg이 찌고 (친정에서 먹는 밥이 좋긴 좋다) 

엄마아빠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전화로 새로운 잔소리를 하고,

아빠의 아침 찬거리를 주문하고 

아이의 유치원 여름방학 일정이 언제인지 찾아본다. 

다음엔 다 같이 가서 인생 네 컷이라도 찍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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