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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트라 Feb 25. 2024

형제가 있다가 없어지면 공허합니다.

형제 관계에 대하여


"부모보다 형제가 죽으면 더 오래간다고 하더라."



두 달 만에 만난 소꿉친구가 소주를 따라주며, 제게 해줬던 말입니다.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지만, 술을 최대한 멀리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꿉친구를 만난 그날, 저는 무너졌었거든요. 그날 이후로,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셔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허무합니다. 참고 있던 허무함과 공허함이 터져버리지요. 인생을 열심히 살아봤자,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같은 사람의 목숨이 왜 이렇게 하찮아 보이는 걸까요. 오늘 저는 형제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어릴 때 치고받고 싸운 형제라고 해도 성인이 되면 심리적인 의지가 됩니다. 각자 가정을 꾸려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선가 든든한 나만의 버팀목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생각 하나 때문에 뚝심이 생깁니다.


조금 삐뚤어지게 말하면 "내가 저 새끼보다는 사람답게 잘 살아야지."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보통 오빠를 둔 여성 분들은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지요. 오빠 새끼라고 부릅니다. 의붓 오빠는 멀리 여행을 떠났지만, 친오빠는 살아 있어서 저런 마음이 듭니다. 이런 게 형제간의 의지와 우애라면 그런 거겠지요.




의붓 오빠가 죽고 나서 정말 자매처럼 의지하는 소꿉친구를 만나니,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제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제 친구도 장례식장에 오려고 했지만, 그 친구의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기도 했고요. 그 친구가 왔더라면, 저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무너졌을 겁니다. 상을 치르고 난 이후에 봤는데도 무너졌는데,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얼굴을 마주쳤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저는 친구에게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성씨를 바꿨는데, 정말로 장녀가 돼버렸어. 그래도 의지했던 오빠가 먼저 가버렸네. 이제 정말 부모를 혼자서 돌봐야 하는데, 고민할 때마다 누구한테 의논해야 돼?"라고 물으니, 제 친구 왈, "야, X까지 마. 너 원래 오빠한테 의지 안 했어. 너 혼자서 네가 알아서 다 했다고." 친구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 저는 형제한테 의지하지 않는 성격일뿐더러, 인생의 라이벌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형제 하나가 없어져 버리니 알겠더군요. 이 경쟁심마저 의지했던 마음이라는 것을요. 소주잔을 내려놓고, 펑펑 우는 저를 보던 친구는 위로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네가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친오라버니가 계시잖아. 의붓 오라버니가 이 정도인데, 친오라버니가 만약에라도 그렇게 된다면.. 어우, 야. 상상도 하기 싫다. 나는 네가 무너지는 게 속상해."


, 제게는 오빠가  명이 있습니다.  명은 살아있고요.  명은 멀리 여행을 가버렸습니다.  진짜 고민을 하면 매몰차게 구는 오빠들을  때마다, 저는 오빠들을 원망했습니다. 마치 본인과 상관없다는 듯이 태도를 취하는  정말  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형제들을 마음속에서 지웠지요. 사실 저는 의붓 오빠가 그렇게 되기 전까지 그들을 죽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아들로 태어난 남자 새끼들은 왜 다 그런 걸까요? 저는 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본인의 가족이 진지한 고민을 말할 때마다 남보다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게 정말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가정환경이 어떻든 상관이 없더군요. 그냥 한국에 '아들'로 태어난 남자들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구는 걸까요? 그래놓고 죽을 때 돼서야 혹은 가족을 잃고 나서야 후회를 하더군요. 정말 꼴불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제 의붓 오빠가 진심으로 밉습니다. 부모님이 왜 헤어졌는지 다 알면서, 본인이 아프기 시작하니 그제야 아버지가 눈에 밟혔겠죠. 황혼을 맞은 헤어진 부모님을 다시 이어주려고 혼자서 애썼더군요. 기가 막히네요. 저는 이래서 한국 남자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이기적이거든요.




제 형제들은 이미 제 마음속에서 한 번씩 죽었습니다. 저는 늘 제 인생을 홀로 개척해나가야 했고, 힘들다고 울부짖어도 가족들은 각자 본인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 때문에 매몰차게 굴더군요. 제가 정신과를 다니고 나서야 제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술을 마시다 분노가 터져 나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의식적으로 표출하는 게 아닙니다. 제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죠.


오빠들이 제 마음을 알까요? 가끔 가다 어린 나를 돌보지 않았던 친오빠가 생각이 나는데요. 엄마와 살기 싫다고 울던 제게 너도 이제 나이가 어리지 않다고, 5년 뒤면 너도 30살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살기가 올라오더군요. 물론 본인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했겠지만, 마치 제가 본인한테 거머리처럼 붙어먹을까 봐 지레 겁먹고, 남들보다 못하게 말했던 친오빠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서 죽였습니다. 실제로도 저는 친오빠를 죽은 형제로 취급합니다. 친오빠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꼭 깨닫길 바랍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다간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요.




제게도 친족으로 이뤄진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은 있습니다. 저는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분노를 하나씩 담아두고 있습니다. 의붓 오빠도 빠지지는 않죠. 엄마를 정말 힘들게 했으니까요. 저랑 친해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었고요. 밖에서만 잘해주지, 집 안에서는 개망나니 아들이었습니다. 결혼도 마음대로 해버려서 부모님이 헤어졌고요. 막상 몇 년 살다 보니 힘들었는지, 엄마한테 SOS를 쳤다고 하네요. 아무리 본인의 인생이라지만, 그건 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헤어진 후, 저는 엄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을 때, 의붓 오빠도 제 마음속에서 죽였습니다. 가끔 가다 엄마 입에서 나오는 엄마 아들 새끼들의 이름이 그렇게 듣기가 싫었고요. 엄마 자식은 나 하나라고 주입시켰던 것 같습니다. 나한테 여태까지 장녀로 생각하고 의지했으면서, 이제 와서 아들 새끼들을 찾냐고요. 내가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냐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이제 와서 나를 자식 취급하지 말라고, 그 좋은 아들 새끼들 찾아가라고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저도 한 성깔 하는 개딸입니다. 절대 부모님에게 순종하거나 애교가 많은 착한 딸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제가 부모님을 용서할 수 있었던 건 의붓 오빠 덕이었습니다. 제게 본인의 죽음으로서 용서를 알려줬네요. 형제 관계가 이런 걸까요? 저는 좀 억울합니다. 마음껏 분노하고 싶은데, 이제 그만하고 쉬라고 말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좀 덜 아파하고, 온전히 쉬기 위해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활력을 조금은 얻은 것 같고요. 그럼에도 이 글을 쓰면서 터져 나오는 울분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일상 생활하면서 많이 줄어든 것 같네요. 죽음으로 용서를 비는 의붓 오빠 덕에 부모님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할 땐 에너지가 배로 들어가더군요. 이제 그만하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제 마음에서 죽였던 형제가 정말로 죽어버리니 공허하네요. 제 뿌리 하나가 잘려나간 기분입니다. 가끔 가다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꼭 제 가족이 하늘나라로 가면 그렇더라고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몇 년 간은 지금 내가 사는 현실에 내가 존재하는 게 맞는지 생각했고요. 의붓오빠마저 멀리 가버린 지금도, 어딘가에서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으려고 합니다. 제 죽음에는 아무것도 없겠지만, 제 가족들에겐 그 죽음의 끝에 다른 세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새 '다중우주론'이 주목받고 있다고 하죠? 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다른 우주에선 다른 상황에 처한

제 가족들이 건강하게,

좋아했던 거나, 하고 싶었던 걸 모두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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