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도 더 된...
스무살, 대학에 입학하고 첫 독립을 했다. 독립이라 말하지만 실은 공간으로부터의 독립만 했을 뿐이고, 경제적 독립은 하지 못했다.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이라 생각해왔기에 롯데리아에서 첫 알바를 시작했다.
근로계약서를 적었는지 적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하지만, '햄버거 제조'라는 내용이 명기된 계약서 같은 곳에 이름 석자를 적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마도 대기업 프랜차이즈이니까 근로계약서는 작성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약 6개월 정도 하게 될 알바를 시작하게 됐다.
생애 첫 알바에 대한 희미한 기억 몇이 있다.
첫째, 햄버거 번 여러 개를 한 번에 들다 허리 부상을 당했다. 허리 부상은 제때 치료받지 못해 다음 해에 군입대할 때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햄버거 번이 담긴 초록 박스(소주를 유통할 때 쓰는 박스와 색이 비슷하다)를 5개 정도 겹쳐 들었는데 다리를 쓰지 않고 허리로 드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왔다. 앉고 눕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자 병원을 가고 약국을 갔지만 알바비를 다 써버렸다.
둘째, 같이 일하던 타과 군필 형을 동경했다. 그 당시 군필이라는 점은 너무나 부러운 대상이었고, 심지어 그 형은 장우혁을 닮은 외모로 주문을 받는 다른 알바 누나와도 사귀는 사이였다. 나도 군대에 다녀오면 애인을 사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형이었다.
근데, 그 형은 왼쪽 팔 바깥 부분에 크고 넓은 화상흉터를 갖고 있었다. 맨 처음 그 상처를 보여줄 때 태연함을 넘어 약간의 자랑(?)스러움도 느껴졌는데 햄버거 패티를 굽고 남은 찌꺼기를 그릴로 미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였다. 그릴을 미는 왼쪽 손을 놓치면서 그릴에 팔을 쓸려버린 것이었다. 화상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마저 멋져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명확한 산재다. 어떻게 치료했는지 묻지 못했는데, 아마... 산재처리는 못했었던 것 같다.
셋째, 같이 일하는 또 다른 형은 장신에 복서였다.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부산시장배? 무슨 대학부 입상 경험도 있다고 했다. 나도 강해지고 싶어 집에서 맨몸운동을 했었다. 복서는 과묵했지만 햄버거는 아주 섬세하게 만들었다. 점심시간 전에 가장 잘 팔리던 불고기 버거 12개를 미리 만들어 놓는 스킬은 복서에게 배웠다.
넷째, 성이 '성'인 동갑내기가 있었다. 나보다 2달쯤 늦게 들어와서 먼저 퇴사했는데, 신기한 친구였다. 다른 과 학생이었는데 말을 할 때 확 집중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시까지 무척이나 소심했던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신기했다. 이 친구의 애인도 같이 취업했었는데, 그 친구의 그런 점을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다섯째, 점장이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희다 못해 창백한 남자 정장이었는데, 나를 꼬꼬몽(코코몽을 귀엽게 강조해서 불렀다)이라고 불렀다. 신경이 예민해서 다른 알바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나를 유독 좋아했다. 점장은 알바들 중 유독 여자 알바들에게만 까칠하게 굴었었는데, 그런 이유로 여자 알바들은 나에게 점장을 마크하길 요청했었다.
그러나 나 또한 까칠함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군대 가기 전 좀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점장에게 퇴사를 고했을 때, 지금으로 따지면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갑질을 당했다. 주문도 없는데 감자튀김을 기름에 잔뜩 넣어서 건져놓으면 왜 이렇게 많이 넣었냐고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황당하다). 한 번은 기름을 쏟아서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바닥을 청소하는데 실수했으니까 1달 동안 더 일하라고 윽박지르다가 내가 정색하니 어린것들이 버릇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뭐 그랬다.
여섯째, 주휴수당을 못 받았다. 당시 최시급은 4,320원. 일주일에 일한 시간대로 최저시급을 곱해 월급을 받았다. 패스트푸드점은 으레 그러겠거니 해서 공강시간, 저녁시간, 아침시간 가리지 않고 스케줄에 내 이름을 채워넣어 월급을 받았다. 한 번은 그렇게 일해서 월급 60만원 가까이를 받아 아빠한테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약 150시간을 어떻게 일했는지 모르겠다(방학이긴 했다). 그때 받지 못한 주휴수당을 산정하면 적어도 100만원은 될텐데...
경제적 독립 노력은 군대를 전역하고서도, 수험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됐다. 왜 그렇게 경제적 독립에 집착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후회는 없다. '알바'라는 노동을 통해 나름의 노동감수성을 익혔는지 단시간 노동자 상담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들에게 알바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까... 왜 적었는지 모를 십년도 더 지난 알바 수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