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밖으로 향하는 감각

by 김덕분

몸과 건축이 서로 닮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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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등지고, 몸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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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위에 나란히 선 두 발.

신발을 벗고 체중을 고르게 내려놓는 순간, 땅이 먼저 내 몸의 위치를 알아챈다. 성지를 등지고 선다는 건 건축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몸의 발언이기도 하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 언덕과 내 뒤에 선 벽돌의 육중한 숨결이 묘한 균형을 이루는 자리. 그 중심 축 한가운데에서 나는 타다아사나로 호흡했다.


<타다아사나>

척추를 세운다는 건, 벽돌을 올린다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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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팔은 몸통 옆에 내려두고, 척추는 벽돌을 쌓듯 곧게 세웠다. 정수리가 하늘 쪽으로 길게 뻗어나가자, 마치 건축물의 수직선과 내 몸의 중심선이 서로를 의식하는 듯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잔디의 기울기, 귓가로 스쳐가는 바람, 맨발에 닿는 흙의 온도까지 모두가 조용히 나를 세워주고 있었다.



“건축은 몸과 공간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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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모성지는 소란을 거두고 사람을 ‘세우는’ 건축이다. 지붕처럼 둥글게 열린 두 개의 탑은 마주보거나 등지는 방식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을 놓아둔 형태다. 마리오 보타는 건축을 “몸과 공간의 화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건축이 중력을 거스르는 예술이 아니라, ‘무게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타다아사나 역시 마찬가지다. 힘으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몸의 무게를 땅에 맡기며 중심을 찾아가는 자세다.



존재를 놓아두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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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보타는 이런 말도 남겼다.

“건축은 기억과 몸이 만나는 장소를 만든다.”

그 말대로였다. 이곳에서는 건축이 조형물이 아니라, 숨과 감각을 내려놓는 하나의 신체처럼 느껴졌다. 벽돌의 재질감, 반복되는 수평의 선, 기단처럼 낮게 펼쳐진 잔디밭, 그리고 그 안에 선 나. 몸이 공간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계단에서도, 골목에서도 있었지만, 오늘은 ‘세워짐’이라는 감각으로 다가왔다.


타다아사나는 가장 단순한 듯 보이지만, 가장 솔직하게 나의 상태를 드러내는 자세다. 어깨가 굽으면 건축도 굽는다. 척추가 긴장하면 공간도 숨이 막힌다.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면, 발바닥 아래의 땅마저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자세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최소 단위의 건축 행위와도 같다.



몸이 서는 자리에서 건축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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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로 시야가 트이고, 뒤로는 성소의 곡선이 버티고, 위로는 하늘이 열린다. 몸은 산처럼 고요하고, 마음은 안식처를 따라 숨을 내쉰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나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세가 공간을 지지하는 듯한 감각. 건축과 몸은 서로를 흉내 내지 않지만, 닮은 방식으로 서 있다.


돌아서지 않아도 느껴지는 건축의 숨결, 눈 감아도 이어지는 땅의 곡선, 그리고 자세 하나로 스며드는 고요. 남양성모성지는 ‘앉거나 기도하는 성지’가 아니라, ‘선 채로 쉼을 시작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몸을 세우는 일은 건축을 세우는 일과 닮아 있다. 벽돌을 쌓듯 척추를 세우고, 하중을 나누듯 체중을 양발에 싣고, 하늘과 맞닿듯 정수리를 띄운다. 결국 자세도 건축도 ‘존재를 어디에, 어떻게 놓아둘 것인가’의 문제다.

<타다아사나>

나는 오늘 그 답을 잔디 위에서, 건축의 뒤편에서, 두 발 아래의 흙에서 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몸이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곳에 건축은 완성되고, 숨이 머무는 자세에서 공간은 비로소 빛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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