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밖으로 향하는 감각

by 김덕분

움직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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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은 것은 풍경이 아니라 ‘소리’였다. 집과 집 사이가 촘촘한 언덕진 골목 어귀마다 저마다의 리듬이 흘렀다. 낮이 되면 재봉틀이 끊임없이 돌아가며 척척척 바늘을 내리꽂았고, 골목에는 원단을 잔뜩 싣고 오르내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진동처럼 퍼졌다. 기계음과 사람 손의 박자가 얽혀 만들어내는 이 동네의 소리는 노동의 역사이자 삶의 호흡이었다. 창신동은 오랫동안 봉제 산업의 심장처럼 뛰던 동네였고, 그만큼 아이들이 마음껏 뛰고 굴러도 되는 제대로 된 공간은 없었다.


‘놀이터’라는 단어는 창신동에 잘 맞지 않는 낯선 언어였다. 새 건물을 지을 땅도, 나무 한 그루 심을 여유도 없었다. 전수 조사 끝에 공영주차장 가장자리에 뿌리를 내려보기로 했다. 2014년과 2015년, 동료들과 함께 창신동에서 ‘창신소통공작소’를 만들며 주민들과 공간을 상상하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차장은 단순히 차를 세우는 장소가 아니라, 언젠가는 사람들이 모이고 아이들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기가 흐르는 마당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난 그때 막 움튼 생각에 ’community parking‘이라는 개념의 씨앗을 품었다.


창신소통공작소는 공모사업이었고, 이것을 씨앗으로 함께 할 놀이터 조성을 자치구에 제안을 했다. 어디에 놀이터가 만들어지면 좋을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골목을 걸으며 살펴, 구청 담당자와 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때까지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파른 지형과 삐뚤어진 골목은 뛰어놀 자리를 미리 봉인해 둔 것처럼 보였고, 도시는 아이들의 부재를 묵묵히 드러내고 있었다.


(공작소가 준공될 무렵 난 연구소를 나와서 나에 길을 걸었다.

그리고 3년 후, 창신동에 놀이터가 조성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반가웠다. 찾아갔다.)


그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산마루놀이터였다. 창신동의 꼭대기, 낙산의 능선 위에 만들어진 이 공간은 단순한 어린이 시설이 아니었다. 이곳은 도시에 없던 감각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 가까웠다. 언덕과 계단, 절벽과 담장이 교차하는 이 동네에서, 산마루놀이터는 바람과 시선을 동시에 펼쳐내는 작은 에너지의 중심이 되었다. 남산과 종묘와 성곽길, 건물 지붕과 멀리 흐르는 도시의 결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자리. 아이들이 그 위에서 몸을 던지고 뛰어오르고 주저앉는 순간, 창신동의 풍경은 변화하고 있었다.



몸, 움직임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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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34도의 여름날, 나는 산마루놀이터에서 아도 무카 스바나아사나를 했다. 두 손과 두 발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리고, 엉덩이를 하늘 쪽으로 끌어올리며 꼬리뼈를 자유롭게 세웠다. 손바닥에 금세 열기가 번졌지만, 거꾸로 본 하늘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숨은 위로 끌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떨어졌고, 시선은 다리 사이를 통과해 느릿하게 경사를 따라 흘렀다. ‘놀이터’라는 단어가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몸에 스며들었다.


아이들이 이 자세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금 이해했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접고 땅을 짚는다. 세이는 돌 무렵부터 이 동작으로 놀았다. 휘어진 등, 기울어진 무릎, 땅으로 향하는 머리. 다리 사이로 뿜어 나오는 세계는 장난감 같은 건물, 어른의 발끝, 그림자와 돌멩이와 이름 모를 풀잎들.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뒤집히는 그 짧은 순간이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탐험이 된다.



마을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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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는 도시의 남은 공간에 ‘기능’을 채워 넣는 시설이 아니다. 도시가 얼마나 건강한지는 아이들이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느냐로 드러난다. 도시공간문화 연구자들은 말한다. 공원의 면적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소리 질러도 괜찮은 장소가 존재하는가’, ‘어른의 시선이 통제인지 돌봄인지’, ‘바닥과 구조물이 아이의 동선을 막는지 이끄는지’ 여부라고…


산마루놀이터는 그 면에서 작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낙산의 지형이 품은 경사와 계단, 골목 깊은 곳에서 올라온 노동의 숨결, 바람길과 시선의 확장,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는 열림까지. 이 작은 공간은 창신동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의 몸이 사유자유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과거에는 어른들의 노동이 공간을 메웠다면, 이제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마을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나에게 움직임은 감각이 열리는 문이다. 그래서 몸을 숙여 바라본 이 놀이터의 세계는, 작은 동작 하나로 도시를 다시 경험하게 했다.

<아도 무카 스바나아사나>


이 시는 자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어떤 풍경은 눈이 아닌 발과 손이 먼저 본다. 숨이 닿는 바닥, 피부에 스며드는 열기, 발목과 손목이 버텨낸 무게, 그 아래에서 들려오는 세상의 소리. 그 모든 것이 몸의 언어이자 감각의 흔적이다.


몸, 시


두 손, 두 발

차분히 땅에 내린다


엉덩이는 하늘로

꼬리뼈는 안테나처럼 곧게

발뒤꿈치는

한발 한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손바닥에는

금세 불이 날 것 같은 열기

그런데도

거꾸로 보는 세상의 바람은

왠지 시원하다


땅과의 접촉

손과 발의 접지력

거친 구조물

신발 바닥

앞뒤 어디로도 밀리지 않는다


손바닥 아래

뜨거운 모래 알갱이 몇 개

그 감각이 오늘을

더 오래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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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 무카 스바나아사나>

도시가 숨 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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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자유롭게 눕고, 숙이고, 구르고, 기어오를 수 있는 자리. 그 움직임 속에서 도시는 비로소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산마루놀이터에서 요가를 할 때 ‘도시도 함께 숨을 쉰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꾸로 본 하늘 아래에서, 나는 창신동을 다시 배운다. 숨과 땅, 오래된 노동과 어린 시선, 열기와 그림자, 발끝으로 이어지는 낙산의 경사, 그리고 어딘가에서 흐르는 바람과 온기까지. 그 모든 것이 도시를 움직임 이는 감각의 요소라 본다.


나는 믿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도시는, 여전히 가능성을 품은 도시라는 것을.


그리고 놀이터는 그 가능성이 가장 먼저 숨 쉬는 자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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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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