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밖으로 향하는 감각

by 김덕분

일상 속 작은 명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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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은 경복궁의 서쪽, 인왕산의 동쪽에 자리 잡은 동네다. ‘서쪽 마을’이라는 이름 그대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삶을 이어온 터전이다. 겸재 정선이 풍경을 그렸고, 윤동주와 이상 같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머물렀다. 그들의 흔적은 지금도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다. 벽에 붙은 작은 표석, 오래된 하숙집, 문학비처럼, 서촌은 시간을 품는 마을이다.


내가 서촌을 제대로 둘러본 것은 2014년쯤이다. 건축가, 예술가, 기자, 인문학자들과 함께 골목을 걸었다. 누군가는 이곳이 음기가 세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경사진 골목과 좁은 담장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일 거라 했다. 눈앞에는 낮은 한옥 지붕과 기와, 담장 너머의 작은 마당이 이어졌고, 발아래로는 오르내림이 끊이지 않았다. 코끝에는 장작을 태우는 냄새가 났고, 귀에는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겹쳐졌다. 보이지 않는 풍경이 감각을 통해 다가오던 순간이었다.


골목길의 매력은 빛과 그림자에서도 드러난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문과 처마 아래의 그늘, 낮은 벽에 드리운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고 끌어당기며 골목의 표정을 만든다. 걷다 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느려진다. 풍경화처럼 골목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다양한 건축이 쌓아 올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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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걷다 보면 건축적 디테일이 감각을 깨운다. 전통 한옥, 개량 한옥, 서양식 양옥, 오래된 근린생활시설까지, 건물마다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있다.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 나무 대문은 오래된 몸짓 같고, 사자 얼굴이 새겨진 양옥의 손잡이는 익숙했지만 낯선 얼굴 같다. 금이 간 담장은 ‘상처’처럼 보이고, 반짝이는 타일 벽은 ‘치장한 얼굴’처럼 느껴진다. 구불구불한 철제 창살은 작은 조형 작품 같아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비가 오는 날, 흙길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한옥 나무에서 스며 나오는 향은 또 다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좁은 골목과 계단이 반복되는 지형 덕분에, 작은 동네임에도 시선이 끊임없이 달라진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같은 풍경도 다른 장면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서촌은 변화를 겪는 중이다. 전통 한옥이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현대식 건물이 채운다. 새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보다 공사장의 망치질이 크게 들리기도 한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마주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른다.

<단다아사나>

계단, 과정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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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오래 눈을 머무는 곳은 ‘계단’이다. 계단은 단번에 목적지로 이끌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단계를 밟게 한다. 그래서 계단은 ‘결과보다 과정’을 상징한다. 오르며 숨을 고르고, 중간에 ‘참’에 서서 잠시 멈추고,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한다.


고대 신전이나 중세 성당의 계단은 신성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의식을 담고 있었다. 땅에서 하늘로, 인간이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불교 사찰의 긴 계단은 번뇌를 하나씩 벗겨내는 수행의 길이었다. 계단은 늘 ‘오르는 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영화 속에도 계단이 자주 등장한다. 〈걸어도 걸어도〉,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 가족〉… 그곳의 계단은 가족과 일상, 세대 간의 연결과 단절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서촌 골목길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단순한 오르막이나 내리막 이상의 감각이 일어난다. 계단은 ‘누군가와의 거리’, ‘나의 상태’, ‘지금 이 순간의 과정’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온다.


나에게는 경복고등학교로 향하는 계단이 그렇다. 주말마다 농구를 하러 가던 길, 몸이 지친 날에는 천천히 올라가며 마음속 고민을 곱씹었고, 기운이 넘치는 날에는 빠르게 내려가며 스스로 가벼워짐을 느꼈다. 같은 계단이지만 그날의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다가왔다. 어떤 날은 고민의 무게를, 어떤 날은 발걸음의 가벼움을 담아냈다.


그러다가 농구를 하다가 손가락을 크게 다치며 계단과의 리듬이 끊겼다. 운동이 멈추자 일상도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단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학교 4학년, 야외 조각전을 위해 만들었던 ‘계단 의자’가 떠올랐다.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작업했고, 의자는 자연스레 하늘 높이 뻗어 오르는 계단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계단과 요가, 그리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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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는 나의 새로운 계단이 되었다. 사실 나보다 먼저 요가를 시작한 건 짝꿍과 딸 세이였다. 세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요가를 함께했고, 짝꿍은 1년간 요가 교육 과정을 거치며 요가의 기쁨을 깊이 경험했다. 짝꿍은 요가가 혈액순환을 돕고, 기운을 북돋아주며, 도반들과의 연결감을 선물한다고 말했다.


육아에 지쳐 보이던 내게 짝꿍은 요가를 권했다. “덕분도 요가를 해보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어느 날 요가 교육 과정을 선물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요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삶의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요가도 급하지 않았다. 숨과 몸을 알아가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는 과정이었다.


계단, 단다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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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정을 마친 뒤, 나는 일상 속 수련 공간을 찾고 싶었다. 골목을 걷다 마주한 계단 앞에서 문득 서고 싶어졌다. 주말마다 오르내리던 바로 그 계단. 나는 그곳에서 단다아사나를 했다. 좌골과 미골을 뿌리 깊게 뿌리내리고 곧게 선 막대 자세. 나에게 단다아사나는 ‘과정 위에 서 있는 나’를 보여주는 자세다.


계단은 내 삶의 여정을 닮아 있다. 오르내림 속에서 멈추기도 하고, 다시 나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요가는 그 계단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일상 속 작은 명상 공간, 서촌의 골목길과 계단은 그렇게 나의 호흡과 발걸음을 담아내는 장소가 되었다.

<계단, 단다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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