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옛날 다니던 직장의 상사 분이시기도 했던 주례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 자리에서 결혼 그리고 가족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이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밖에 일을 안으로 갖고 오지 말고, 안에 일을 밖으로 가져가지 말아야 해"
쉬운 것 같지만 참으로 어려운 말. 회사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퇴근하고 나서 까지 가족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나저나 10년 동안 난 그 말씀을 잘 지키고 살았을까?
월급쟁이로서 비일비재한 경우지만 얼마 전 회사에서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다. 퇴근하고 나서도 문제가 해결이 안 돼 전화기를 붙잡고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 앞에서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게다가 하필 그날은 한참 전부터 아내와 딸아이가 꼭 가보고 싶다는 식당을 가기로 한날이었다. 회사 일 때문에 약속을 깰 수는 없어서 일단 식당을 가서 자리를 잡고 앉긴 했는데 계속되는 일 관련 전화를 받느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딸아이가 아빠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인상을 쓰고 있으니 밥 먹을 때 쌈도 싸주고 괜히 웃긴 표정도 지어주고 하는 딸아이가 그 심각한 와중에도 무척이나 기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 표정이 그다지 풀리지는 않았나 보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들어보니 내가 밖에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아이는 자기가 애교를 부려도 아빠의 표정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감을 토로했단다. 미안했다.
이튿날 미안한 마음에 퇴근 후 학원 앞까지 마중을 가서 기다리다가 끝나고 나온 딸과 함께 둘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친구들 얘기가 나왔다. 학교 반 친구들끼리 “누구랑 누구는 사귄다더라” 이러면서 노는 모양이었다. 3학년이니 그럴 법도 하다 싶었다. 곧이어 궁금증을 못 참고 내가 질문을 던졌다. “너도 혹시 남자 친구 있어?” 물었더니... 있단다. 충격!! “누구야?” 다시 물었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아빠!”라고 하는 게 아닌가. 세상 이렇게 행복한 고백이 있다니.
언제까지 품 안에 자식일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자 나이 50대 후반을 넘어가면 친구들끼리 모여 잘난 체하는 요소 중 모두의 부러움을 가장 크게 사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돈 얼마나 버는지? 아내랑 관계가 좋은지? 아이가 어느 대학 갔는지? 모두 그럴듯하지만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바로 ‘딸과의 관계’라고 한다. 고등학생 이상 자녀가 퇴근하고 들어갔을 때 아는 척이라도 해주면 중간은 가고 아이가 아빠랑 말이라도 섞어주면 중상급, 장성한 딸이 아빠랑 포옹이라도 해주면 그 아빠는 친구들에게 최고로 부러움을 산다는 거다. 어떤 사람은 20살 넘은 딸이 뽀뽀도 해준다고 해서 레전드 취급을 받기도 했단다.
우리 딸 같은 경우엔 10살이 넘은 아직까지 놀 때 밥 먹을 때 씻을 때를 가리지 않고 아빠를 찾는다.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딱 2학년이 고비라고 했다. 그 시기가 지나면 몸에 착착 감기던 딸들이 데면데면 해지면서 아빠를 찾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딸은 아직도 아빠가 없으면 못 살 지경이니 10년 동안 열심히 키워온 보상이라 생각하면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엔 우리 딸아이도 무럭무럭 자라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남자 친구도 만나고 급기야는 결혼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농담처럼 아내와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딸이 사윗감을 처음 집으로 데려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뺨부터 후려칠 거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진심이다. 참고로 아내는 예비사위에게 김장 테스트를 시켜 볼 거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가엾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엔 뜸해졌지만 한동안 아이와 함께 결혼식엘 자주 다녔다. 우선 혼자 가면 뻘쭘한 결혼식도 많은 데다가 아이에겐 결혼식 자체도 이벤트 행사처럼 느껴져 재미있어했고 그래서 잘 따라다니기도 했다. 화려한 의상에 현란한 조명에 노래와 춤도 있고 플래시 팡팡 터지며 사진도 잔뜩 찍고 적당한 농담과 장난까지! 그러고 보면 결혼식이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두루 갖춘 한 편의 버라이어티 쇼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딸과 아빠의 결혼식 놀이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때는 그렇게 아빠와 함께 결혼식을 다녀오면 꼭 하는 놀이가 있었다. 바로 결혼식 놀이. 사실 결혼식 놀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어디선가 사온 신부머리 장식인 베일이 달린 머리띠를 쓰고 아빠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거실 끝에서부터 반대편 끝까지 “딴딴 다단~” 결혼행진곡에 맞추어 행진을 하는 것이다. 그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반복해서 행진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하면 “네!”, “네!” 각자 대답을 하고 다시 반대로 돌아 행진하면 끝. 딸아이가 어려서부터 역할놀이를 많이 해서 연습이 된 건지 아니면 원래 관찰력이 좋은 건지 다녀온 결혼식에서 봤던 상황이나 행동, 멘트 들을 기억해뒀다가 집에 와서 아빠랑 결혼식 놀이를 할 때 그대로 적용하는 적도 많았다.
최근에는 결혼식엘 가게 되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신랑, 신부가 아닌 부모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당연하게도 특히 신부의 부모에게. 나이 듦에 따른 호르몬 변화 탓인지는 몰라도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할 때나 결혼식 도중 부모님께 인사를 할 때 괜스레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고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인생인 것을.
끝으로 딸아이가 늘 하는 말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자기는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하면 꼭 엄마 아빠 가까운 곳에서 살 거라고 했다. 남다른 효심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기 애를 봐줘야 하니까 엄마 아빠가 있어야 한단다. 특히 아빠는 자기의 경험에 따르면 애를 잘 보니까 꼭 필요하다고 했다. 강아지도 키울 건데 밥 주고 산책시키는 것도 아빠의 몫이란다. 나이 들어서도 딸 옆에 살 수 있으니 좋아해야 하는 건가? 이래저래 활기찬 노년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고맙다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