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왔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뭔가 여느 때와 다른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빠~"하며 다다닥 뛰어와 안기는 딸아이였는데 그날따라 인기척도 없었다. 일찍 잠들었나 보다 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오려는데 어디선가 아이가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손가락으로 한쪽 벽을 가리키며 자기가 붙인 종이를 좀 보라고 했다.
그래서 뭔가 하고 봤더니 벽에 붙은 종이에는 딸아이가 직접 그린 그림이며 쓴 글들이 잔뜩 있었다. 현관에서부터 거실 벽까지 마치 무슨 시리즈처럼 여러 장이 순서대로 붙어있었는데 걸어가면서 읽어보니 내용인즉슨 오늘 영어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그림일기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학원에서 쪽지시험을 봤는데 채점 결과 7명 중에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시험을 잘 봐 기분이 좋았는지 기념으로 아빠에게 주는 쿠폰도 있었다.
평소 무용을 하는 터라 부모 입장에서도 사실 다른 공부에는 그렇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고 아이도 특별한 욕심이 없는 편이었는데 영어를 통해서는 꽤나 재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얼마 뒤 치른 다음 시험에서는 35문제 중 34문제를 맞혀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관심도 없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굳이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사실 어떻게 형성된 나의 교육관인지는 모르겠으나 난 아이가 공부를 정말 1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1분이라도 더 재미있게 노는 것이 긴 인생을 봤을 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입시만을 위한 교육은 절대 반대였는데 그래서 학원도 본격적인 공부보다는 예체능 쪽 위주로 보내기도 했었다. 사실 내가 가진 이런 교육관은 아내의 생각과 전혀 달라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내는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였고 내 입장에서는 도대체 그 기본이라는 게 뭐냐 억지로 시키다가 공부 자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 어쩌냐라는 거였다. 그럼 다시 아내는 요즘은 학원 안 가면 같이 놀 친구도 없다고 말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뱅뱅 도는 말싸움도 몇 번이나 했었다.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나는 이 변두리 동네에서 도대체 가르치면 뭘 얼마나 가르치겠다는 거냐? 그렇게 백날 해봐야 대치동 목동 애들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등의 감정 섞인 말들을 내뱉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영어학원을 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처음엔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언어라는 건 공부이기도 하지만 삶을 윤택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마지못하는 척 동의를 했었다. 솔직히 속으로는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 다니는 애들이 수두룩 빽빽이고 더 나아가서는 외국에서 공부했거나 살다 온 애들 아니 더더 나아가서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애들이 전 세계에 몇 억 명은 될 텐데 단순히 영어공부 좀 한다고 우리 아이가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더 나은 인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실시간 자동 통번역은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영어로 먹고 살 거 아니라면 벌써부터 힘들게 공부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가 영어를 재밌어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스스로 흥미를 느끼면서 한다는데 자식 인생에 훼방꾼이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걸 말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옛말처럼 역시 타고난 자 노력하는 자 즐기는 자 중에 제일은 즐기는 자였나 보다. 본인이 흥미를 느끼고 하다 보니 학원 선생님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반으로 옮기자는 말씀을 하셨고 갑자기 수준이 올라간 탓에 따라가기 버거웠을 텐데도 집이며 학원에서 힘들게 보충 공부를 하면서까지 노력해서 옮긴 반에서도 1등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렇다는데 아빠 된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딸아이의 보충 공부를 도와줄 겸 영어를 좀 더 재미있게 공부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몇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이왕이면 재밌게 영어 공부 하기
언어는 결국 어휘력 싸움이 아니던가. 그래서 최근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도 단어 암기였는데 그 옛날 우리가 공부할 때처럼 종이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해서 쓰면서 외우 다간 금세 흥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암기에 있어 좀 더 재미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선 기본적으로 단어를 처음 설명해줄 때는 과장된 몸짓과 억양을 동원했다. 잘 이해가 안 간다고? 그냥 얼굴에 철판 탁 깔고 갖은 오바를 다 떨면 된다. 예를 들어 ‘깨물다’는 뜻의 bite가 나왔다고 치면 마치 사과라도 베어 먹는 양 입을 쩍 벌리고 “앙앙!” 소리도 내가면서 “바이트 깨물다 앙앙!” 몇 번이고 반복을 하는 거다. 한발 더 나아가 아이의 팔을 앙! 깨무는 척을 하면서 “바이트 바이트!” 이렇게 외치기도 하고. 썰렁할 거 같다고? 오바해서 몇 번이고 하면 아이는 웃게 마련이다. 언젠가 말했지만 코미디의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반복’ 임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아이는 엄마보다 아빠가 가르쳐주는 게 더 재밌다는 수강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와는 조금 다른 반복이긴 하지만 평소 생활에서도 한번 배운 표현은 가능하면 자주 사용하고 접하게 끔 했다. 만일 ‘wake up’을 전날 공부했다면 꼭 그다음 날 아침엔 “Wake up!”이라고 크게 외치며 아이를 깨웠다. 단어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건 기본이고 덤으로 이렇게 깨우면 아이도 전날 공부한 게 생각나서 재미있는지 기분 좋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단어 중 한 글자만 주고 스피드 퀴즈 형식처럼 맞혀보게도 했다. “a로 시작하는데 과일! 빨간색 과일인데 백설공주가 먹은 과일!” 하면 아이가 “a-p-p-l-e!” 하고 맞히는 식이다. 또는 십자 낱말 풀이나 서로 해당되는 것 줄 긋기, 영어 끝말잇기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가능한 지루하지 않게 해 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한 가지 내가 제일 자신 없는 발음의 경우에는 꼭 네이버 사전 같은 것을 켜놓고 원어민 발음을 몇 번이고 강조해서 들려주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도 조금은 영향을 끼쳤겠지 몰래 자부하면서 그 뒤로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괜히 혼자 뿌듯해하고 그러기도 했다. 앞으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가르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재미있게 아이와 영어로 놀아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나의 교육관이 바뀐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이가 재밌다고 하니 도와주는 것이고 언제라도 재미없다고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두게 할 생각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어는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도구라 생각하기 때문에 모국어 외에 하나쯤 언어를 익혀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중에 AI가 실시간 통번역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감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기도 하니까. 누가 또 아는가? 나중에 딸 덕분에 해외여행 편하게 하게 될지.
끝으로 제일 처음에 소개했던 딸아이의 쿠폰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마지막 종이에는 쿠폰이 두 장 그려져 있었는데 그 쿠폰은 바로 <뽀뽀 4초 쿠폰>과 <껴안기 5분 쿠폰>이었다. 세상에나! 아빠는 퇴근하자마자 로또를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장고 끝에 결국 4초 뽀뽀 쿠폰을 선택했고 이내 딸아이에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뽀뽀를 받게 되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의 영어학원 선생님께 이런 부탁을 드려볼까 한다. “선생님! 쪽지시험 좀 자주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