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온도를 재는법
감정이 나를 비추듯, 관계는 서로의 한계를 비춘다. 우리는 그 간격 속에서, 이해와 오해가 뒤섞인 인간의 거리를 배워간다.
최근 카카오톡이 업데이트됐다.
반응은 상당히 엇갈렸다. '1점 리뷰'가 폭주하고 혹평이 잇따르자 결국 카카오에서는 이용자 피드백을 반영해 일부 기능을 개선했고, 이번 주 초 개선방향을 공지한다고 한다.
무심코 누른 업데이트 후 카카오톡을 보면서 든 생각. 'SNS 기능을 상당 부분 담으려고 했구나.' 카톡의 본질적인 부분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문득 생각났다. 내가 정말 불편해하는 건 UI가 아니라는 걸. 카톡을 열 때마다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고2, 중2 아이들과 나는 카톡을 자주 하지 않는다. 보통 필요할 때만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챙길 것이 있거나, 간단한 요청에 대한 대답 정도. 십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이다.
그런데 이 일상 속에 예상보다 복잡한 감정들이 숨어 있더라.
하지만 늘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메시지 옆의 '1'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짧다. "응." 이 한 글자가 전부다.
이상한 건, 이 단순한 패턴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거다. 읽었는지, 무시했는지, 대충 넘긴 건지 알 수 없어서. 카톡의 '1'은 그냥 숫자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해석을 낳는다.
'혹시 내가 너무 잔소리했나? 아니면 정말 바빠서 못 본 걸까? 그냥 귀찮아서 성의 없게 답하는 건 아닐까?'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작은 신호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점점 더 경제적이고 함축적이 되어간다.
최근 오사카 엑스포에 함께 다녀온 지인 얘기가 생각난다. 국립대 건축학과 교수님인데, 가족 단톡방 이야기를 하시더라. 아내와 성인 자녀,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그 단톡방에서 본인이 무언가 말하면 '3'이라는 숫자가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분의 씁쓸한 웃음 속에는 중년 남성의 특별한 설움이 담겨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분명한 권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지만, 가족 단톡방에서는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한 듯했다. 우리, 참 비슷하다.
며칠 전 중2 아들 휴대폰 액정이 깨져서 수리센터에 다녀왔다. 수리 끝나고 찾으러 갔을 때, 무심코 열린 카톡 창이 보였다.'봐도 될까, 닫아야겠지.' 잠깐 망설였다가 이내 덮어버렸다. 하지만 스쳐 본 대화 몇 마디는 낯설게 남았다.
같은 한국어인데도 도무지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줄임말, 기호, 웃음 표시들로 이어진 대화는 또래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내 세대에게는 암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알았다.
'아이들은 우리 세대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구나.'
아이들이 친구들과 나누는 활발한 대화와, 부모에게 건네는 단조로운 "응"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다. 같은 아이가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언어적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아빠와의 관계에서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만큼 심리적 거리감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아이들의 "응"을 조금 다르게 읽으려 한다.무시나 무관심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애정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긴 설명 대신 한 글자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도 그들만의 신뢰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
물론 아이의 성향마다, 부모와의 관계마다 다를 것이다. 소통 잘 되는 가정도 분명 많다. 어쩌면 이건 인지부조화를 이겨내기 위한 나만의 위안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도 거리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내가 억지로 소통하겠다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 부모가 아이들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답변하지 않는다고, 내 생각에 따르지 않는다고 다그치는 것도 문제다. "카톡에 왜 대답을 안 해?" "아빠가 물어보는데 성의 없게 그래?" 이런 말들은 오히려 아이를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
부모 자식 간에도, 특히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와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영역에서 숨 쉬고, 생각하고, 성장한다. 부모는 그 공간을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최근 고2가 된 딸아이가 오히려 내가 집에 가면 다가와 은근히 말을 건다. 기특하기도 하면서 '아, 이제 좀 컸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도 스스로 다가오는 때가 온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며칠 전, 아이에게 "오늘 공부하느라 힘들지 않았어?"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응"에서는 평소와 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같은 글자였지만, 그 속에는 '괜찮다'는, 안심시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사라지지 않는 '1'도, 짧은 '응'도, 모두 하나의 언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 중년 부모의 배움인지도 모르겠다.
‘1’은 결국 사라진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고, 또 자신을 다독인다. 관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전히 가능하다.
이해와 오해, 거리와 온도.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타인을 향해 배우며 나아간다.그러나 그 거리의 끝에서 우리는 묻는다.
가까워질수록 왜 마음은 불안해지는가. 사랑은 왜, 이해보다 더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