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이 벗겨낸 사랑의 환상
관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전히 가능하다. 이해와 오해, 거리와 온도.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워간다. 그리고 그 거리의 끝에서, 사랑은 우리를 다시 시험한다.
요즘 나는 ‘나는 솔로’를 즐겨본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연애 예능 같지만, 내게는 하나의 사회 실험 프로그램처럼 느껴진다.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언어와 태도로 끊임없이 평가받는 장면들. 누군가는 스펙으로, 누군가는 분위기로, 누군가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출연자들의 공통된 고민은 늘 이렇다.
“가슴이 뛰는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나에게 맞는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그 사이에서 모두가 망설인다. 결국 각자의 가치관이 그들의 선택을 결정짓는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어떤 이는 로맨티스트처럼, 또 어떤 이는 계산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개인의 몫이다.
그 절실함만큼은 누구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이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이 프로그램을 보며,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의 책은 사랑의 달콤한 포장지를 하나씩 벗겨내며, 그 안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말한다.
“사랑의 불안은 잘못된 만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은 환상 때문입니다.”
그 문장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현명하게 사랑할 수 있을지. 알랭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낭만적 사랑 그 후의 일상》을 빌려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우리는 평생 로맨스 드라마 속에서 자란다. 우연한 만남, 오해, 고백, 키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엔 늘 이렇게 적혀 있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사랑을 ‘아나토미(Anatomy)’, 즉 해부의 시선으로 본다. 문학에서 ‘아나토미’란 인간의 결함과 욕망을 낱낱이 드러내는 장르를 뜻한다. 그는 사랑을 낭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만 하는 감정으로 바라본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주인공은 비행기에서 한 여성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운명이야!”라고 확신하지만, 드 보통은 그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가 그녀에게 끌린 이유는 운명이 아니라,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부모의 이미지와 닮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말은 차갑지만, 사실은 따뜻하다. 사랑을 이해 가능한 인간의 감정으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상대의 버릇, 짜증, 불안함까지도 그 사람의 과거와 상처가 만들어낸 흔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이 드 보통이 말하는 ‘아나토미적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환상을 부수지만, 그 자리에 이해를 남긴다.
사랑이 식은 게 아니라, 이제 진짜가 시작된 것이다.
결혼 3년 차 부부가 있다. 남편은 아내가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아내는 남편이 더 이상 자신을 챙기지 않는다며 서운해한다. 둘 다 이렇게 묻는다. “사랑이 식은 걸까?”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연애 초기의 설렘은 사랑이 아니라 기대였다. 진짜 사랑은 그 기대가 깨진 후에 시작된다.”
사랑은 완벽한 합의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는 연습이다.
운명이 아니라 훈련이고,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다.
끌림은 결핍의 거울이다.
너는 어떤 사람에게 끌리나? 늘 밝은 사람? 나를 챙겨주는 사람? 혹은 차가울 만큼 냉철한 사람?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묻는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너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건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끌리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람은 어쩌면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감정의 조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늘 불안하다. 그 사람을 잃는 건 곧 나의 결핍이 다시 드러나는 일이니까.
사랑을 사회적 성취로 착각하지 않기
명절이면 이런 말을 듣는다. “결혼은 언제 해?” “좋은 사람 소개해줄까?”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나의 가치처럼 느껴질 때, 사랑은 이미 왜곡된다.
진짜 사랑은 보여주기 위한 스펙이 아니라, 두 사람만의 은밀한 이해와 성장이다.
사랑은 ‘운명’이 아니라 ‘노력’이다
운명적인 사랑은 없다. 있는 것은 매일의 대화, 오해, 화해, 그리고 다시 이해하려는 노력뿐이다.
주말 아침,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물어보자. “이번 주에 제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어?”
사랑은 대단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런 작은 질문의 반복이다.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타인에게 사랑받기 전에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내 결핍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결핍을 함께 바라볼 용기에서 시작된다.
자신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남의 기준이 아닌 나의 속도로
사랑에도 속도가 있다. 누군가는 빠르게 불타오르고, 누군가는 천천히 익는다.
중요한 건 ‘우리의 속도’를 지키는 것이다.
SNS에 올리기 위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만의 시간을 쌓아가는 사랑. 남들이 부러워하지 않아도, 나에게 평온을 주는 사랑. 그게 알랭 드 보통이 말한 현실적인 낭만이다.
사랑은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불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불안은 관계가 살아 있다는 신호이자, 이해를 배우는 과정이니까.
알랭 드 보통은 말했다.
“진짜 마법은 환상이 아니라 이해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사랑은 운명보다 꾸준함에서 자란다.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그 작은 반복이, 결국 사랑을 오래 가게 만든다.
사랑은 완벽해지려는 감정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순간마다,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사랑은 없다. 그 불안은 사랑이 아직 ‘살아 있는’ 증거다. 사랑은 불안을 품으며 자란다.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래서 “이해해”라는 말엔 위로와 함께, 상대를 내 틀 안에 두려는 마음이 함께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