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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한다는 것

한나 아렌트, 그리고 실패한 대화의 정치학

by Jwook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종종 서둘러 판단한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를 범주 속에 가둔다.
한나 아렌트의 ‘판단’은 그 순간을 멈춰 세운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사유는 어디서부터다시 시작되어야 할까.

방문을 닫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금 막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으려 하다가, 오히려 판단해버렸다.


질문이 아니라 범주였다

며칠 전 저녁이었다.

딸아이가 방에서 나와 조용히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나는 즉시 되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친구랑 싸웠어?

아니면 성적 나왔어?”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그 순간,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문득 알아차렸다.

나는 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딸의 고통을 분류했다.


친구 문제, 성적 문제.

내가 익숙한 범주 속에 아이의 경험을 밀어 넣으려 했다.

마치 서랍장에 물건을 정리하듯, 아이의 아픔에 라벨을 붙이려 했다.


그것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일상적인 형태가 아니었을까.


아이히만은 우리 안에 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충격적인 진단을 내렸다.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아이히만은 악마도 괴물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완전한 무사유(thoughtlessness)가 그로 하여금 시대의 가장 거대한 범죄자 중 한 명이 되게 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아렌트가 경악한 것은 악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 평범함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사유하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질서에 따라, 시스템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나는 딸의 방문 앞에서 이 문장을 떠올렸다.

물론 나의 실수와 아이히만의 범죄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유의 부재라는 구조는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나는 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딸을 처리 가능한 문제 유형으로 환원하려 했다.


판단은 공감의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공감은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고, 판단은 거리를 두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아렌트의 판단 개념은 이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녀는 칸트의 미학에서 빌려온 ‘판단(judgment)’을 “옳고 그름을 가르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자리에서 사유하려는 능력”이라 설명한다.


그녀는 이를 확장된 사고 방식(enlarged mentality)이라 불렀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실제로 있지 않은 자리를 상상 속에서 방문하는 것”

— 『칸트 정치철학 강의』(1982)


중요한 건, 이것이 감정이입(empathy)과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네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이지만, 네가 보는 세계를 상상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능력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복수의 관점들(plurality)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노크의 정치학


나는 다시 딸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다르게 말했다.


“아빠가 네 힘든 걸 너무 쉽게 어떤 문제로만 보려고 했던 것 같아.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도 괜찮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네가 나에게 왔다는 사실이 고마워.”


아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말했다.

“응… 근데 아빠, 나도 잘 모르겠어. 뭐가 힘든지.”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아이는 명확한 문제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말로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친구 문제도, 성적 문제도 아닌 아직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첫 번째 대화에서 나는 아이가 사유할 공간을 차단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가 아니라, “이 중에 하나겠지?”라는 닫힌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두 번째 대화에서 나는 비로소 판단했다.

판단한다는 것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공감의 폭력성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공감이 가장 폭력적일 수 있다.


“나도 그랬어.”

“그럴 만하지.”

“다 이해해.”


이런 말들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상대의 고유성을 지워버릴 위험이 있다.

너의 경험을 나의 범주 안에 넣는 순간, 그 고통은 “흔한 일”이 되고, 너는 “여러 사례 중 하나”가 된다.


아렌트가 경고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집단이 단일한 관점으로 통합되는 순간, 정치는 사라진다.


“복수성(plurality)이야말로 인간 조건의 핵심이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와 같지 않다.”

— 『인간의 조건』(1958)


진정한 공감은 “나도 알아”가 아니라 “나는 모른다”에서 시작된다.

나는 너의 고통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모름을 인정하기에, 나는 네 말을 들을 수 있다.


솔직함이라는 오해


그렇다면 솔직함은 어떨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

“내 입장에서는 네가 틀린 것 같아.”


우리는 이런 말을 종종 용기라고 여긴다.

정치적 올바름에 갇히지 않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것.


하지만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런 솔직함은 무사유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솔직함’은 종종 나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리에서만 세계를 보고,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지 않은 채 “이게 진실이야”라고 말한다.

진정한 판단은 다르다.

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타인의 관점이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한다.


“나는 이렇게 보는데, 너는 왜 그렇게 보는지 더 듣고 싶어.”


이것이 아렌트가 말한 대표적 사고(representative thinking)이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것을 상상하는 힘.

내 안에서 복수의 관점을 대화시키는 능력.


판단의 실패를 판단하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자주 실패한다.


며칠 후, 딸이 다시 “힘들다”고 말했을 때, 나는 또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라고 조언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또 알았다.

판단은 단번에 습득되는 기술이 아니다.


아렌트는 판단을 기술(skill)이 아니라 능력(faculty)으로 보았다.

기술은 배우면 반복 가능하지만, 능력은 매 순간 새롭게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황은 매번 다르고, 상대도 변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딸과 오늘의 딸은 같지 않다.

어제의 말이 오늘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아렌트가 정치를 “시작(beginning)”의 영역으로 본 이유다.


“행위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 『인간의 조건』(1958)


나는 딸과의 대화를 ‘마스터’할 수 없다.

나는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무사유의 시대에 사유하기


2025년 지금, 우리는 판단 없는 반응의 시대에 살고 있다.


SNS에서 누군가의 게시물을 보는 순간, 우리는 0.3초 만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넘긴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만 보여주고, 우리는 점점 다른 관점을 상상할 필요를 잃어간다.


뉴스를 보면, 댓글은 이미 결론으로 가득하다.

“이건 잘못됐다.”

“저 사람은 틀렸다.”


누구도 “왜 저 사람은 그렇게 말했을까?”를 묻지 않는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분류하고 반응한다.


아렌트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유 없이 작동하는 사회.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은 악마적 천재성이 아니라,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멈추어버린 평범한 사고였다.

그리고 그 평범함은 전체주의 체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관계 속에도 존재한다.


판단한다는 것의 불편함


판단은 불편하다.


상대가 힘들다고 말할 때, “나도 그랬어”라고 반응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러나 “나는 그걸 잘 모르겠어”라고 인정하는 일은 낯설고 불안하다.


누군가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할 때, “그건 틀렸어”라고 말하는 것이 간단하다.

하지만 “왜 그렇게 보는지 듣고 싶다”고 말하는 일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판단은 나를 확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옳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함께 세계를 구성해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아렌트는 바로 이 불완전함이 인간됨의 조건이라 말한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다르기에, 우리는 함께 판단해야 한다.


오늘 밤, 나는 무엇을 판단하지 않았는가


이 글을 쓰며 나는 계속 묻는다.


오늘 나는 누구의 말을 듣지 않고 분류했는가?

오늘 나는 어떤 순간에 사유를 멈추고 반응했는가?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질문들은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자리에 나를 다시 세우는 물음이라는 것을.


아렌트는 우리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그녀는 다만 말한다 — “생각하라.”


생각한다는 것은 불편하다.

생각한다는 것은 느리다.

생각한다는 것은 확신을 유예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그 느림, 그 유예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세계를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정치의 시작이다.


어제, 딸은 내게 물었다.

“아빠는 나를 이해해?”


나는 대답했다.

“아니, 완전히는 못 해. 그런데 그래서 더 듣고 싶어.”


딸은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없었다.

해결책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판단했다.

서로의 다름 앞에 멈춰 서서,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보려 애썼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판단은 결론이 아니라 멈춤이다. 서로의 다름 앞에 잠시 서서, 함께 세계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정치이자, 우리가 다시 인간다워지는 순간이다.
사유가 잠시 멈추었을 때,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이성의 언어가 닿지 못한 자리에서, 감각이 천천히 그 빈틈을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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