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이 말을 걸던 순간

하이데거, 존재의 길 위에서

by Jwook
이해의 끝에서, 말은 멈췄다. 더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 닿지 않는 문장들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때 문득, 창밖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빛은 조용히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세상은 여전히 말을 걸고 있었다. 언어가 아니라, 빛과 바람과 냄새의 결로

그날의 가로수

퇴근길이었다. 어제도 지났고, 내일도 지날 그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도로 옆 가로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빛이 흔들렸다. 그 작은 떨림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이 길에 이런 나무가 있었나?"


수없이 지나쳤던 풍경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린 것처럼. 그때 문득, 한 이름이 떠올랐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를 잊고 사는 우리

하이데거는 20세기 철학의 흐름을 바꾼 사람이다. 그의 스승 후설이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는가'를 탐구했다면, 하이데거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갔다.


"그 경험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철학의 중심을 완전히 이동시켰다. 철학은 더 이상 '앎'의 문제가 아니라 '있음'의 문제가 되었다. 그의 물음은 이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이어지며 현대 철학의 뿌리가 되었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물들을 '그냥 거기 있는 것'으로 취급하며 살아간다고. 책상은 책상이고, 컵은 컵이고, 나무는 나무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본다. 그렇게 세상은 너무 익숙해져서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펜이 부러지거나, 의자가 삐걱거릴 때, 혹은 그날의 가로수처럼 아무 이유 없이 우리의 눈에 걸릴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존재'를 느낀다.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그 깜빡이던 가로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빛과 바람, 그리고 내 시선이 겹치며 마치 "나는 여기에 있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하이데거는 이런 순간을 '비은폐(Aletheia, 진리의 열림)'이라 불렀다.

존재는 멀리 있지 않다. 그저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하지 못할 뿐이다. 가려져 있던 것이 갑자기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존재와 마주한다.

다들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지 않은가. 여행을 떠나 낯선 도시에 발을 디딜 때, 우리는 문득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처음 보는 골목길, 낯선 간판, 이름 모를 냄새. 모든 것이 선명하고 생생하다. 그런데 똑같은 거리를 매일 걷는 집 앞 골목에서는? 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곳에서 우리는 투명해진다.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손에 쥔 컵의 온기를 느낄 때. 산책하다가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대화하다가 상대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세계는 다시 낯설어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자각한다.


던져진 존재, 선택하는 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특별히 '현존재(Dasein)', 즉 '거기에-존재하는-자'라 불렀다. 우리는 단순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어딘가에 던져져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나라에, 이 도시에, 누군가의 부모의 자식으로 던져졌다. 그는 이 상태를 '피투성(Geworfenheit, 던져짐)'이라 했다.


하지만 인간은 던져진 채로 머물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기투(企投, Entwurf)한다. 과거에 던져진 존재가, 미래를 향해 자신을 설계하고 다시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지금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회사원'이라는 상황에 던져져 있다. 하지만 퇴사 후 창업을 할지, 이직을 할지, 휴식을 취할지는 당신이 선택한다. 그 선택 속에서 당신은 새로운 자신을 기투한다.


그날의 가로수처럼, 삶은 우리가 잠시 멈출 때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때 존재는 조용히 속삭인다.

"너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너는 선택할 수 있다."

존재와 역사의 그림자

하이데거의 사유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 1933년,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스승인 후설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그를 외면했다. 그의 제자 한나 아렌트 역시 유대인이었고, 그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홀로 독일을 떠나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하이데거는 명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존재의 진리'를 탐구하던 철학자가 왜 역사의 어둠 속에 섰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어떤 이들은 그의 철학과 정치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사상 자체에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 사실이 그의 철학을 무효화할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것만은 기억해야 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것'과 '타자를 존중하는 것'은 결코 별개가 아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하이데거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존재보다 먼저 오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다."


가로수 옆에 선 당신

그날 이후로 나는 운전할 때 일부러 창문을 조금 연다. 빛의 각도, 바람의 냄새, 나뭇잎의 그림자. 그 모든 것 안에서 '존재의 숨결'을 느낀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우리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지만, 존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어쩌면 철학이란 어려운 사유가 아니라, 이처럼 잠시 멈춰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게 다가올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 있음'을 자각한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로수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면, 나는 그의 '존재'도 마주했을까?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고 불렀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음'을 깨닫는 일이 아닐까.

존재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내 옆에 선 당신의 존재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남은 건 조용한 숨소리였다. 눈이 멈춘 곳에서, 귀가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도 들리는 건 있었다. 누군가의 숨결, 공간을 타고 번져오는 아주 미세한 울림. 세상은 여전히, 빛 대신 소리로 말을 걸고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