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리가 머무는 공간

재즈와 도시, 그리고 공간이 만드는 리듬

by Jwook
빛이 사라지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그 조용함 속에서 귀가 깨어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소리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밤, 창문을 열자 도시의 어둠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초저녁,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어디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연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곡명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음이 건물 사이를 부드럽게 흘러다니며 마음을 멈추게 했다. 누군가의 일상적인 숨결이, 회색 벽을 타고 조용히 번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잠시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고, 그 울림이 다시 밤공기를 타고 퍼졌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이 소리는 어떤 공간에서 가장 잘 머무를까? 소리의 모양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공간의 모양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그날 밤, 불을 끄고 재즈를 틀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재즈가 사라지는 건, 어쩌면 그 소리가 머물, 딱 맞는 '집'이 사라져서가 아닐까.


1920년대, 소리와 건물이 함께 춤춘 시절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1930)을 본 적 있는가. 뾰족한 은빛 첨탑, 계단처럼 쌓인 외관. 그 건물은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정점이다. 그 건물을 처음 보게 되면, 재즈를 떠올리게 한다. 트럼펫처럼 하늘로 솟은 수직선, 피아노 건반 같은 창문 배열, 리듬처럼 반복되는 장식.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1930), 사진: Unsplash의 Jason Krieger

알고 보니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20~30년대는 ‘재즈 에이지(Jazz Age)’라 불리던 시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전기의 불빛이 밤을 밝혔다. 모든 것이 빨라졌고, 예술은 그 속도와 리듬을 품었다. 그 시대의 감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소리(재즈), 하나는 건물(아르데코).

아르데코 (Art Deco) 양식
1920~3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건축 양식으로, 산업화의 기계미(美)와 도시의 속도감을 시각화한 스타일이다. 금속·유리·기하학적 패턴을 이용해 “현대적이지만 장식적인 건축”을 지향했다. 직선과 대칭, 수직적 상승감,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은 바로 그 시대의 재즈 음악의 즉흥성과 리듬감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르데코는 시각의 재즈였다.

재즈는 즉흥적이지만 구조가 있었고, 아르데코는 대칭적이지만 리듬을 품고 있었다. 둘 다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지금을, 더 높이.” 재즈는 시간을 리듬으로 쪼갰고, 아르데코는 공간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며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공유했다.


쿠바 하바나의 낡은 집에서, 소리의 질감

세월이 흘러 1999년, 독일 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쿠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늙은 음악가들을 만나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제목은〈Buena Vista Social Club〉.

영화 속 배경은 놀랍다. 페인트가 벗겨진 벽, 녹슨 철문, 금이 간 타일 바닥. 1920년대에 지어졌을 법한 아르데코 양식의 낡은 건물들이었다. 그 오래된 공간에서 노인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한다. 완벽한 녹음실도, 최신 장비도 없다. 하지만 기타 소리는 벽에 부딪혀 부드럽게 퍼지고, 목소리는 천장에 닿아 따뜻하게 울린다.


재즈 같은 음악은 그런 공간과 잘 어울린다. 너무 깨끗하면 차갑고, 너무 넓으면 소리가 흩어진다. 오래된 석회벽과 나무 바닥, 적당한 높이의 천장. 이 '불완전한 마감재'가 오히려 소리를 과하게 튕겨내지 않고 감싸주며 따뜻한 잔향을 만들어낸다. 아르데코의 금속은 녹슬었지만, 그 리듬은 여전히 그 공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2025년, 재즈가 쉴 곳이 없는 이유

요즘 재즈는 인기가 없다고들 한다. 한국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재즈 장르가 차지하는 비율은 여전히 1% 내외에 머무르며, K-Pop, 힙합, 발라드 등 주류 장르의 파이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미미하다.


서울의 명맥을 잇던 오래된 재즈바들, 특히 홍대나 이태원 인근의 라이브 클럽들은 높은 임대료와 젠트리피케이션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문을 닫거나 외곽으로 밀려났다. 사람들은 흔히 "요즘 트렌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다. 재즈는 본래 '그 자리'에서 들어야 하는 음악이다. 스피커로 듣는 재즈와, 작은 클럽 구석에서 들리는 재즈는 완전히 다르다. 재즈는 현장성(Liveness)과 즉흥성을 핵심으로 한다.


건반 치는 소리, 드럼 브러시의 미세한 질감, 베이스의 진동이 공기를 타고 청자에게 '직접' 전해질 때, 즉 음악과 공간, 그리고 청자가 하나의 리듬으로 공명할 때 비로소 '재즈'가 완성된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사라지고 있다. 가장 큰 적은 경제 논리다. 높은 임대료와 함께 강화된 소음 규제 (특히 주거지 인근의 경우)는 라이브 공간 운영에 치명적이다. 여기에 효율 중심의 재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천장이 낮고 울림이 좋은 오래된 건물들이 '다목적, 무소음'을 지향하는 새 건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클럽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공연장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이는 재즈의 리듬과 질감이 머무를 '집'이 사라지는 일이며, 음악을 경험할 수 있는 문화 생태계 자체가 붕괴하는 것이다.


효율의 시대, 침묵의 건축

요즘의 건물들은 너무 조용하다. 벽은 두꺼워지고, 유리는 소리를 반사하고, 천장은 흡음패널로 덮였다. 모든 소음이 제거된 공간에서, 소리의 온도도 함께 사라졌다. 우리는 모든 공간을 ‘무음의 악기’로 만들어버렸다.


표면은 매끈하고, 각도는 정확하며, 공기는 완벽히 통제된다. 하지만 재즈는 그런 공간을 싫어한다. 소리가 벽에 스치며 생기는 미세한 마찰, 그 비효율의 순간에서 리듬이 태어나는데 요즘의 건물들은 그 홈(凹)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목적”이라는 말은 언뜻 유연해 보이지만, 그 속엔 아무것에도 깊이 반응하지 않는 ‘중성의 공간’이 숨어 있다. 모든 예술은 자신만의 울림을 필요로 한다. 재즈는 낮은 천장을, 시는 정적을, 회화는 빛의 각도를. 그런데 다목적 공간은 그 어떤 요구에도 공명하지 않는다. 그저 가능성만 제공할 뿐,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은 ‘머무름’의 공간

요즘 우리는 모든 것을 효율의 잣대로 측정한다. 한 공간에서 여러 일을 하고, 빠르게 설치하고, 빠르게 철거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잊었다. 어떤 음악은, 어떤 감정은, 그 공간에서만 완벽하게 완성된다는 것을.


재즈는 재즈바에서, 책은 서재에서, 깊은 대화는 아늑한 거실에서 완성된다. 물론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음악을 '소비'하는 것이지, 공간의 맥락과 온도를 공유하며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기능성이 아니라, '머무름'과 '비효율적인 울림'을 허락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공간을 찾는다

가끔 일부러 오래된 골목을 걷는다. 2층짜리 낡은 건물들 사이로 난 좁은 길. 그런 곳에 숨어 있는 작은 재즈바를 찾아 들어간다. 커피나 위스키를 시키고 구석 자리에 앉아 가만히 듣는다.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 낮은 천장 아래 머무는 피아노 선율. 완벽하지 않다. 음질도 별로고, 의자도 불편하다. 하지만 그게 진짜다.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공간이 소리를 감싼다. 그 순간만큼은 음악이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을 스친다.


요즘 재즈는 스타벅스의 BGM이 되거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속 ‘분위기 음악’으로 소비된다. 완벽한 음질, 손쉬운 접근성. 그러나 그곳에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비효율적인 틈, 따뜻한 울림이 없다.


재즈는 죽지 않았다. 다만 머물 곳을 잃었을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는 다시 그런 공간을 만들 것이다. 크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공간이 존재하며 ‘비효율적인 틈’을 허락하는 일이다.


언젠가 다시, 소리가 머무를 작은 틈이 도시 곳곳에 생겨나길 바란다. 만약 당신의 동네에 세월의 냄새가 스민 작은 재즈바가 있다면, 단순히 음악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소리가 깊이 머무는 공간을 지키러 가는 일로 생각해보라. 그 공간의 따뜻한 울림이,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리듬을 조용히 되살려 줄지도 모른다.

사진: Unsplash의 John Matychuk

소리가 멈춘 자리에는 묘한 고요가 남았다. 그 고요 속에서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나는 그 느림이 만들어내는 리듬 속에 잠시 머물렀다.
공기 속에서 먼지들이 천천히 빛을 따라 흩어졌다. 모든 것이 멈춘 듯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라진 소리의 여백 속에서, 몸은 다시 세계를 감각하기 시작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