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숨겨진 라깡의 거울
사랑은 불안과 함께 자란다.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상대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래서 사랑의 말에는 언제나 “이해해”가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말은 종종 위로가 아니라, 상대를 내 틀 안에 두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Jacques Lacan)이 남긴 한마디는 연인 관계의 가장 깊은 모순을 꿰뚫는다.
"우리가 말한다고 믿는 그 순간, 사실은 언어가 우리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조금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연인과 다투고 화해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이보다 정확할 수 없다.
연인과의 큰 싸움 끝에 당신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그래, 이제 알겠어. 네 마음을 완전히 이해했어."
그 순간, 정말 상대방의 복잡한 감정이 마법처럼 해소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이해했음'을 선언하는 순간은 종종 상대방의 감정 상태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상대방의 진정한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하는 능력 있는 나'의 멋진 이미지이다.
"나는 너의 복잡한 마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이야."
"나는 이 어려운 관계 문제를 마침내 해결해낸 사람이야."
이것은 마치 거울 앞에서 복잡한 하루를 정리하며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네"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
실제 감정은 여전히 얽혀 있지만, 그저 '이해라는 틀 안에 상대를 가둔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 안심하는 자기 위로인 셈이다.
라깡은 이를 상상계의 오인(誤認)이라고 불렀다.
'나는 너를 알아', '나는 널 이해해'라고 단언하는 순간, 우리는 상대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진실을 지워버리고, '내가 편한 대로 정의한 너'라는 환상에 다시 빠져드는 착각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착각은 사랑을 멈추게 한다. 내가 상대를 '이해했다'고 결론짓는 순간, 더 이상 상대를 향한 질문도, 호기심도, 귀 기울임도 멈추기 때문이다.
관계는 성장의 여정을 멈추고, 내가 만든 상대의 박제된 이미지 속에서 굳어버린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의 언어는 무엇일까?
완벽한 이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아직 네가 다 이해되지 않아." "어쩌면 영원히 너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네가 하는 모든 말을 기꺼이 계속 듣고 싶어."
진정한 이해는 다름(차이)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대를 '내 거울 속 이미지'에서 벗어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하나의 '타인'으로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완벽한 '이해' 대신 진실된 '귀 기울임'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귀 기울임'이야말로 사랑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진정한 힘이다.
이 깨달음은 관계의 새로운 문을 연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오만한 선언 대신, "나는 여전히 너를 배워가고 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 우리는 비로소 환상(상상계)의 거울을 깨고 상대의 진실에 다가설 용기를 얻게 된다.
사랑은 정지된 이해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끊임없이 포용하는 역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해하려 애쓸수록, 우리는 언어의 벽에 닿는다. 완전한 이해는 없다는 걸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감각이 열린다. 이해가 닿지 않는 그 순간, 우리는 불안을 견디지 못해 판단으로 넘어간다.
아렌트의 ‘판단’은 그 지점을 멈춰 세우며 묻는다 —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