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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의 알아차림

불교와 메를로퐁티가 열어주는 ‘감정의 공간’

by Jwook
타인의 감정이 파문처럼 번져와 내 마음의 물결을 흔들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감정은 타인에게서 시작되어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가장 긴 여정이다.

직장에서 억울한 말을 들었을 때, 아이에게 소리친 뒤 후회가 밀려올 때, 혹은 배우자와의 대화가 벽에 부딪힐 때를 떠올려보라. 그때 마음은 불길처럼 일었다가, 이내 식어버린다. 이 반복의 근원에는 하나의 오해가 있다. 우리는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내가 화가 났다"는 말 속에는 이미 '감정=나'라는 등식이 숨어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화는 '나'인가,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일'인가? 이 물음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차이가 만드는 간격이 우리를 감정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스쳐 지나가게 하라


몇년 전, 나는 동료의 부당한 비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적이 있다. 평소라면 즉각 반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우연히, 말하기 전에 잠깐 멈췄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화는 여전한데, '내가 화났다'는 확신이 흔들렸다. 가슴의 뜨거움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불교의 사띠(sati), 즉 '알아차림'은 바로 이 경험을 가리킨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는 수행이 아니다. 감정이 주체를 잠식하지 않도록 '간격'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감정의 불길 속에서 이렇게 속삭여보라. "지금 내 안에서 화가 올라오고 있구나."


이 짧은 문장은 감정과 나 사이에 아주 얇은 틈을 만든다. 그 틈이 바로 알아차림의 자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제나 분석이 아니다. 심장의 빠른 박동, 손끝의 떨림, 얼굴의 열기 같은 몸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그저 그 현상을 비추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질문이 남는다. '누가' 관찰하는가? 관찰하는 나 역시 감정의 일부가 아닌가? 이 역설을 해결하려 하지 마라. 그 긴장 속에 머물러보라. 답을 찾으려는 순간 다시 사유의 영역으로, 즉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돌아옴 자체가 간격이다.


감정은 몸이 세상을 향해 취하는 태도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감정을 마음속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감정은 세계를 지각하는 몸의 방향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억울함에 휩싸일 때, 세상이 나를 향해 닫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그 순간, 몸이 세상을 실제로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다.


불안할 때 빛이 유난히 눈부시게 느껴지고, 책상의 모서리가 유독 날카로워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이것은 착각이 아니다. 불안은 세계를 '위협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몸이 감정을 통해 세계를 다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용어로 말하자면, 감정은 세계를 향한 몸의 '지향성(intentionality)', 즉 몸이 세계를 향해 취하는 태도다.


불교의 알아차림과 메를로퐁티의 신체철학을 함께 놓으면 흥미로운 지도가 그려진다. 불교는 '감정과 나의 분리'를 말하고, 메를로퐁티는 '감정의 신체적 뿌리'를 말한다. 둘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현상의 양면이다. 감정은 몸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이 '나'는 아니다. 이 두 통찰을 합치면, 감정은 '몸이 세계와 만나면서 일시적으로 취하는 태도'가 된다.


따라서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지금 내 몸이 이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천천히 통과시키는 일이다.


감정 안으로 들어가기: 경험의 층위들


어느 날 아이가 반복적으로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나는 소리치기 직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를 하면서 얻는 즐거움도 분명 있었지만, 그날은 한계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고함을 삼키며, 문득 이상한 일을 했다. 그 충동 안으로 들어가 본 것이다.


처음에는 '짜증났다'는 판단만 있었다. 조금 더 머물자 목과 어깨의 긴장이 느껴졌다. 더 머물자 그 긴장 뒤로 '내 말을 무시당했다'는 해석이 숨어있음을 봤다. 더 깊이 들어가자 그 무시감 아래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


짜증은 단일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체 긴장 + 해석 + 불안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이 층위들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소리칠 필요가 사라졌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정에 대한 반응이 바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이 일어날 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이 감정이 몸의 정확히 어디에서 느껴지는가?

그 느낌은 언제 시작되었나?

그 느낌 아래 어떤 생각이 있나?

그 생각 아래 또 무엇이 있나?

이것은 기법이 아니다. 성공도 실패도 없다. 그저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는 일일 뿐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도 괜찮다. 관찰 자체가 이미 간격을 만들어낸다.


세 가지 상황, 세 가지 발견


직장에서 억울한 말을 들었을 때

'억울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정의가 무너졌다'는 몸의 신호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그 순간 세계는 '적대적 공간'으로 재편된다. 동료의 얼굴이 유난히 차갑게 보이고, 사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진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몸이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의 변화다.


알아차림은 이렇게 속삭인다. "지금 내 몸이 세상을 적으로 느끼고 있구나." 이 인식만으로도, 세계는 조금 덜 적대적이 된다.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감정과 세계 사이에 얇은 막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에게 소리친 뒤 후회가 밀려올 때

후회는 과거를 향한 몸의 태도다. 몸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붙잡으려 한다. 가슴이 무겁고, 목이 메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몸이 실제로 과거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이것을 본다. "지금 내 몸이 과거를 되돌리려 하고 있구나." 그 순간, 후회는 여전하지만 그것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후회를 느끼는 나와, 후회를 관찰하는 나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 그 간격에서, 아이에게 사과할 여유가 생겨난다.


배우자와의 대화가 벽에 부딪힐 때

답답함은 '통로가 막혔다'는 몸의 경험이다. 실제로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얕아진다.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몸이 세계를 '닫힌 공간'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때 알아차림은 묻는다. "내 몸은 지금 어떤 통로를 열려고 하는가?" 때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 자체가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에서 대화는 다시 흐를 여지를 찾는다. 상대의 말이 조금씩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감정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문이다


감정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붙잡지 않을 때, 그 감정은 제 갈 길을 간다.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흔히 두 가지를 한다. 참거나, 분석하거나. 그러나 철학이 가르쳐주는 태도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참지도, 파헤치지도 않고, 그저 '감정이 일어나고 있음'을 비추는 일. 그때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목격자가 된다.


30초만 더 머물러보라. 화가 났을 때, 불안할 때, 슬플 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말고, 그것이 몸 어디에 있는지만 느껴보라. 그리고 물어보라. "이것은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일'인가?"


답은 중요하지 않다. 질문하는 그 순간, 이미 당신은 감정 밖에 서 있다. 그 간격에서, 자유의 실마리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다만 우리는 그 감정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할 수 있다.

감정이 일어나고, 머물다가, 지나간다.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그것이 알아차림이고, 그것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 자유는 결국,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다시 느끼게 만든다. 감정이 나를 비추듯, 관계는 서로의 한계를 비춘다. 우리는 그 간격 속에서, 이해와 오해가 뒤섞인 인간의 거리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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