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차연으로 읽는 브런치의 좋아요
우리는 그렇게 하루를 건넌다. 그리고 SNS, 플랫폼이라는 세상에서 답을 몰라도, 방향을 잃어도, 서로의 존재가 남긴 미세한 흔적 속에서 길을 찾는다.
어쩌면 그 흔적은 ‘좋아요’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공감은 숫자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온도에 있다.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좋아요가 하나둘 늘어날 때면 괜히 기분이 좋다. 누군가 내 생각에 공감해주고, 그 마음을 하트로 남겨줬다는 게 반갑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브런치에는 '싫어요'가 없을까?"
유튜브에는 싫어요가 있다. 페이스북에도 여러 반응 버튼이 있다. 그런데 브런치는 오직 '좋아요'만 있다. 이 단순한 구조가 어쩐지 묘하게 느껴졌다. 그저 친절한 플랫폼이라서? 아니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는 걸까?
그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장 사이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의 틈새를 파고든 사람이다. "이 단어는 정말 이것만을 의미할까?"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언어의 토대를 흔들었다.
그가 제시한 '해체(deconstruction)'라는 사유 방식은 문학, 예술, 건축, 심지어 법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푸코, 들뢰즈, 라캉과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의 4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토론되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
처음 이 문장을 들으면 당황스럽다. 세상엔 글자밖에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데리다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느낄 때, 그건 언제나 언어와 해석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는 이미 '언어'라는 필터가 끼워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어떤 글을 읽고 "따뜻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같은 글을 읽고 "쓸쓸하다"고 말한다. 같은 글인데도 각자의 경험, 기억, 감정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진짜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의 머릿속? 아니면 글자 자체 안에?
데리다는 말한다. "그건 고정되어 있지 않다. 늘 미끄러지고, 지연된다."
이 '미끄러짐'과 '지연'의 개념이 바로 차연(différance)이다. 프랑스어로 différer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 '다르다'와 '미루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달라지며, 완성은 끊임없이 미뤄진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
당신이 브런치에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하자. 독자 A는 그 단어에서 위로를 느낀다. 독자 B는 공허함을 느낀다. 독자 C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지나간다. 일주일 뒤, 독자 A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계속 미뤄지고(différer), 계속 달라진다(différer). 바로 이것이 차연이다.
의미는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언제나 '도착 예정'일 뿐이다.
데리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도 비슷한 통찰을 내놓았다. 그의 유명한 에세이 「저자의 죽음」(1967)은 이렇게 선언한다.
"글이 쓰이는 순간, 저자는 죽는다. 그 의미는 오직 독자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즉, 한 글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그 글을 읽는 사람의 해석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브런치 작가가 '발행하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바르트의 말처럼 저자는 죽는다. 내가 쓴 "따뜻한 봄날"이라는 문장은, 어떤 독자에게는 희망으로, 어떤 독자에게는 상실의 기억으로 다시 태어난다.
'좋아요'는 바로 그 재탄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버튼이다. 저자의 의도를 넘어, 독자의 해석이 의미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완성은 다시 또 다른 독자에 의해 계속 새로 써진다.
데리다의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저자마저도 텍스트 바깥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해석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읽히는 또 하나의 텍스트일 뿐이다.
이제 다시 브런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좋아요'만 있고 '싫어요'는 없는 구조. 여기에 데리다의 '차연'이 숨어 있다.
만약 브런치에 '싫어요' 버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좋아요'는 '싫어요'와 대립하며 '긍정'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다. 좋아요 = 좋다. 싫어요 = 싫다. 명확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싫어요'가 없는 브런치에서 '좋아요'는 긍정도, 동의도, 때로는 그냥 '읽었다'는 표시도 될 수 있다. 대립항이 없을 때,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 열려 있다.
우리가 누르는 '좋아요'는 정말 '좋다'는 뜻일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섞여 있다.
공감의 의미: "나도 이런 생각이야."
응원의 의미: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관계의 의미: "친구가 쓴 글이라 눌렀어요."
저장의 의미: "나중에 다시 읽으려고요."
때로는 그냥: "읽었어요."
'좋아요'를 누르는 순간, 우리는 '좋다'는 확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그 하트는 내일 다른 사람에게는 '응원'으로, 일주일 뒤 다시 본 사람에게는 '추억'으로 읽힐 수 있다. 어떤 날은 '공감'이었던 하트가, 다른 날은 '위로'가 된다.
'좋아요'는 단 하나의 뜻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싫어요'라는 대립항이 없기 때문에, '좋아요'의 의미는 그 반대 개념 속에서 명확히 정의되지 못한 채 계속 미끄러지고, 지연된다.
결국 '좋아요'는 "좋다"의 표시가 아니라, 공감·응원·기억·관계가 얽힌 하나의 열린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의미는 계속 변하고, 새로 태어난다.
바로 이것이 데리다의 '차연'이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는 철학은 이렇게 일상과 가깝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브런치의 '좋아요'는 하나의 철학적 장면이다.
글을 쓴 사람은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미 떠났고, 그 글의 의미는 이제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데리다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완성된 의미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해석이 교차하며 의미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차연의 세계'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브런치에 글을 쓴다. 누군가 눌러준 하트 하나, 그 속에는 수십 가지의 '좋아요'가 숨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의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언제나 도착 예정일 뿐이다.
공감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닿는 일이다. 그리고 그 닿음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내 안의 물결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감의 온기는 결국, 자기 감정의 온도를 느낄 줄 아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