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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과 자본이 빚어낸 공간

헬스장은 비어 있고, 결심은 꽉 차 있다

by Jwook

토요일 오후, 헬스장 문을 열었다. 주차장에 차가 서너 대. 프런트 직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오늘 정말 조용하죠?" 밖은 가을 햇살이 좋았다. 아마 다들 단풍 구경을 갔을 것이다.


러닝머신 한 대, 스쿼트 랙 한 곳. 나머지 기구들은 조용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평일 저녁이었다면 이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평일 저녁 7시


나는 거의 매일 온다. 퇴근 후 저녁 7시쯤, 헬스장 출입문을 연다. 이 시간의 헬스장은 다르다. 주차장은 거의 만차고, 러닝머신엔 대기자가 생긴다.


그리고 매일 같은 얼굴들이 보인다. 헬스장을 트랙 삼아 큰 걸음으로 걷는 분. 처음엔 의아했지만, 이제는 그분의 리듬을 안다. 늘 무겁게 무게를 치는 분들. 철판이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배에 중량판을 매달고 턱걸이를 하는 분. 그 자리, 그 시간, 그 루틴.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이름도 모른다. 하지만 안다. "오늘도 저 사람, 저 자리에." 이 무언의 동료의식.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사람들만이 아는 감각.


1월 초의 낯선 얼굴들


새해가 되면 헬스장에 낯선 얼굴들이 늘어난다. 새 운동복을 입고, 진지한 표정으로 기구 앞에 선다. PT 상담을 받고, 러닝머신 속도를 높인다. "올해는 진짜 해야지." 그리고 2주쯤 지나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스쿼트 랙 옆에서 20kg 바벨을 들던 남자가 있었다. 동작이 서툴렀다. 옆에서 철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잠시 주춤했다. 물을 마시는 척 쉬다가, 조용히 바벨을 내려놓고 나갔다. 다음 날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애매하네." "어제 야근했으니 오늘은 쉬자."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할게." 이런 변명들이 쌓이면, 결심은 '다음 주'로 미뤄진다. 월 7만 원은 운동의 대가가 아니라,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임대하는 비용이다.


사람 없을 때 가야지


헬스장은 온통 거울로 둘러싸여 있다. 러닝머신에서 뛰다가 옆 사람의 속도를 힐끔 본다. 시속 12km. 나는 9km. 별것 아닌 숫자인데, 이상하게 페이스가 흐트러진다.


벤치프레스를 하다가 옆 사람의 넓은 어깨가 거울에 비친다.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초보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람 없을 때 가야지"라고 결심한다. 이 사회적 회피의 심리가 헬스장의 집단적 리듬을 만든다. 각자 다른 시간대를 선택하고, 자연스럽게 분산된다.

헬스장은 유독 거울이 많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옆 사람과 비교하게 마련이다.

헬스장 업계에서 일하는 지인이 말했다. "100명이 등록하면, 실제로 꾸준히 오는 사람은 20명 정도예요. 만약 100명이 다 오면 기구가 모자라고, 재등록률이 떨어져요." 헬스장은 나머지 80%의 '결심만 있는 회원'이 만드는 여백 위에 설계된 산업이다.


천국의 계단


나는 회식이 있는 날에도 운동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잠깐 들른다. 루틴이 깨지면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근육 운동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텝밀에 오른다. 30분. 사람들은 이걸 '천국의 계단'이라 부른다. 끝없이 올라가는 계단. 땀이 범벅이 된다.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이 30분을 견디고 나면, 샤워 후의 상쾌함이 기다린다. 그 순간이 좋다. 몸이 탄탄해지는 느낌. 자존감이 올라가는 느낌. 그리고 이후에 하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은 기분. 이게 내가 거의 매일 오는 이유다. 일주일에 하루쯤은 쉰다. 완벽할 필요는 없으니까.


토요일 오후의 여유


이 텅 빈 공간에는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 있었다. 평일 저녁의 그 분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낯선 얼굴 두어 명. 아마 평일엔 다른 시간에 오거나, 주말만 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등록 회원은 수백 명일 텐데, 한 시간에 겹치는 건 이십여 명. 나머지는 각자의 시간에,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공간을 이용한다. 혹은 이용하지 않는다.


매일 오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안 오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다음을 기약한다. 둘 다 이 시스템의 일부다. 20%가 꾸준히 와서 공간을 유지하고, 80%가 오지 않아서 여유를 만든다. 이 기묘한 균형 위에 헬스장은 존재한다.


휴대폰이 진동한다. "회원님, 이번 달까지만 할인!" 나는 웃으며 문자를 닫았다. 결제는 내일 자동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월요일 저녁에, 다시 이곳의 문을 열 것이다. 트랙을 걷는 분과, 중량판 턱걸이를 하는 분과, 무겁게 무게를 치는 분들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주말 오후의 헬스장은 여전히 텅 비어 있을 것이다. 단풍 구경을 간 사람들과, 매일 오는 우리가 함께 만드는 풍경이다.

필자가 다니는 24시간 운영되는 헬스장 풍경. 불이 꺼지지 않는 공간. 누군가는 매일 오고, 누군가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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