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점심시간 자주 가는 카페에 가보았다. 한쪽 구석 조용한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카페라테를 한 모금하였는데, 따듯함이 목구멍을 넘어 마음을 녹인다. 들려오는 잔잔한 재즈 음악도 참 좋다. 문밖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뭐 그리 바쁘다고 종종걸음을 걸을까.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찾아왔다. ‘내가 돈을 원 없이 써 본 적이 있었나?’ 갑자기 과거 속 기억을 찾아 헤맨다.
1년 전? 아니 없다. 5년 전? 떠오르지 않는다. 10년 전? 글쎄. 앗. 떠올랐다. 2007년 3월 31일. 결혼 직후 발리로 떠났던 신혼여행.
결혼은 돈에 무릎 꿇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 좋지 못한 형편에 간신히 조그만 빌라를 신혼집으로 구했다. 그것도 반은 대출로. 이제 막 학자금 대출을 갚았는데, 또다시 대출이다. 나보다 훨씬 형편이 좋았던 아내는 거대한 세간을 준비해왔다. 20평도 안 되는 조그만 집에, 40인치 TV(너무 가까워서 눈이 아팠다), 대형 냉장고(늘 반은 텅 비었다), 킹사이즈 침대(방문이 제대로 안 닫혔다)까지. 결혼 준비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모든 게 아내의 성에 차지 않아 보였다. 왠지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다른 것은 양보해도 꼭 신혼여행만은 원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고른 곳이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나에게 떠오르는 발리는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조인성이 주먹을 머금고 우는 장면이 다였다. 그냥 아내가 원하는 데로 따라갔다. 아내는 그 당시 새로 지은 고급 풀 빌라를 예약했다. 속으로 예상 금액을 훨씬 초과하는 가격에 살짝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모든 옵션은 당연히 최상급이었다.
정신없이 결혼식을 마치고, 서둘러 신혼여행지로 떠났다. 그 당시만 해도 발리로 가는 직항이 없어서, 우리는 홍콩을 거쳐서 갔다. 홍콩에서 1박을 하고, 드디어 발리에 입성했다. 친절한 직원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우리 숙소는 넓은 개인 수영장이 있는 독채였다. 수영장을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어림잡아도 길이가 우리 동네 수영장 레인 반 정도는 되어 보였다. 물도 따듯하고, 24시간 언제든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분리된 두 공간에 각각 방이 2개씩 있었고, 야외에도 샤워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풀 빌라 안에 현지식, 유럽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있었고, 원하면 방으로 배달도 해주었다. 삼십 평생 처음 맛보는 호사였다. 마음만은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다. 맘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이제 돈 걱정은 그만하고, 이 순간만큼은 맘껏 즐기자!’
옵션은 먼저 고급 식사였다. 초호화 유람선에 즐기는 해산물 뷔페, 해변에서 일몰을 보며 전문 서버가 구워주는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 두 가지 모두 맛도 경치도 환상적이었다. 나는 중동 왕자가 되어 어깨에 힘이 한껏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옵션은 해양스포츠였다. 바다에서 카누, 스노클링, 바나나보트 등을 실컷 즐겼다. 일과는 늦잠 후 아침 식사, 수영, 풀 빌라 내 점심 식사, 해양스포츠, 럭셔리 저녁 식사, 시내 구경 및 쇼핑, 야간 수영, 음주 후 취침.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점심때쯤 지배인이 나를 은밀히 불렀다. 그리곤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Would you like.......”
안타깝게도 내가 들은 전부였다. 뭔 소리를 하는지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 같았다. 간신히 몇 가지 단어가 들렸다. special event, pool, rose, diner, wife, cost. ‘아내를 위해서 수영장에 장미를 가지고 특별한 저녁 식사 이벤트를 하는데 돈이 든다.’ 비용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상당히 비쌌던 것 같다. 나는 단박에 오케이를 했고, 그날 저녁쯤 쇼핑을 마치고 빌라에 돌아오니 정말 특별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수영장에는 장미 꽃잎이 그림처럼 수놓아 있었고, 최고급 와인과 고급 진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식사하는 중에 밴드가 직접 아름다운 곡을 연주해 주었다. 해 질 녘, 장미꽃으로 붉게 물든 물결을 바라보며 특별한 식사를 마쳤다. 아내는 감동하였는지,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이것이 진정 돈의 힘이란 말인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천국의 기억은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지고 다시 퍽퍽한 삶이 시작되었다. 돈은 수시로 나의 삶을 옥죄였다. 마치 며칠 휴가를 받은 죄수가 일상을 잠시 맛보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삶이 제자리를 자석의 반대 극처럼 귀신같이 찾아갔다.
언제 다시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슬프게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아마 나는 돈의 충실한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나는 10여 년 전 떠났던 신혼여행만큼은 돈의 주인이었다. 살면서 이런 기억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된 거지 뭐. 그 추억을 추억 삼아 오늘도 내 삶에 힘겹게 발을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