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길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음식물과 일반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웬일이냐 물었더니 내가 심심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비위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음식물 쓰레기 담당은 내가 해왔었다. 아무튼 같이 가준다니 기분이 좋았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들이 살갑게 다가와 안고 뽀뽀를 해준다. 평소엔 시크한 면도 많은데 이럴 땐 정말 다정하다. 헷갈리는 녀석이다. 딸은 나를 본체만체 시큰둥했다. 무슨 일이 있나. 아내가 "아빠 얼굴은 봐야지." 하는 한마디에 마지못해 흘끔 쳐다보았다. 아. 만족스럽지 못해라. 딸의 무한 애정 표현에 목마른 나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며칠간 버리지 못해 냄새 뿡뿡 인 음식물 쓰레기를 꽁꽁 싸매서 아내와 길을 나섰다. 아내가 카드를 대고 투입구 문이 열리는 순간 거대 바퀴벌레가 튀어나왔다. "악"소리가 나며 아내가 사라졌다.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바퀴벌레였다. 나는 냉큼 잡아 도로 통으로 집어넣었다. 카드를 한 번 더 대야 문이 닫히는데 난감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주차된 차 뒤에서 꼬리를 발견했다. 아내에게 카드를 받아 간신히 투입구 문을 닫았다. 나는 농담으로 다시는 같이 안 오겠네 했더니 진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말했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크게 아파트 한 바퀴를 돌고 들어갔다.
씻고 나오니 딸은 자러 들어갔다. 방에 가보니 귀엽게 누워 있었다. 옆에 살짝 누웠더니 애정 보따리를 슬슬 풀기 시작했다. 뽀뽀는 기본이고 꼭 안고 볼도 비벼주는 3종 애정 세트를 주었다.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딸의 댄스 대결 제안에 신나게 몸도 흔들었다. 둘만 통하는 감성 코드가 있다. 잠시 쉬러 누웠다. 그리곤 내가 딸에게 물었다.
"딸, 왜 이리 살기 힘든 거지?"
딸은 주저 없이 답을 던졌다.
"어른이니깐 그렇지."
명쾌하다.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 나는 어른이니깐 삶이 힘든 것이었다. 딸에게 깨달음 얻고 잠자리로 향했다.
이불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여태 그걸 왜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