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서막

머리 못 묶어서 미안

by 실배

"아빠. 엄마한테 나 머리 잘 못 묶는다고 빨리 얘기해. 빨리!"

내 팔을 붙잡고 연신 흔들어 내는 딸아이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만. 좀. 있으라고!"

거친 짜증이 한가득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딸아이도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체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스케줄이 빡빡했다. 아침에 아들과 아들 친구들을 학원에 태워주어야 했다. 오자마자 딸과 함께 사촌 여동생 아들의 돌잔치를 참석해야 했고 끝나자마자 서둘러 동네로 와서 아내에게 딸을 인계해야 했다. 오늘 반 모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아들을 데리러 학원으로 향해야 했다. 휴. 모든 일정이 초 단위로 움직여야 가능했다.

오전에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준 후부터 일이 꼬였다. 아내는 분명 안방 서랍 안 빨간 봉투에 돌잔치 축의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연락했더니. 왜 못 찾냐는 타박이 이어졌다. 한가득 짜증이 몰려왔다. 그때 딸아이가 옆에서 계속 머리를 못 묶는다고 엄마한테 얘기하라고 떼를 부렸던 것이었다. 인내심이 역치를 넘겨버렸다. 그래서 큰소리가 나버렸다.

결국 봉투는 못 찾고 옷 입히고 서둘러 나가려는 찰나. 이제는 배고프다고 사탕을 달라고 졸랐다.

"배고파. 막대 사탕 좀. 지금! 지금 줘!"

이그. 슬슬 내 안의 녹색 괴물이 튀어나오려 했다.

"뭐. 사탕? 사탕이 어디 있다고. 지금 빨리 나가야 한다고. 조용해 안 해!"

순간 딸아이는 움찔했고. 기분 상하면 나오는 마네킹 모드를 켰다. 이후론 무표정에 아무 대꾸도 없었다. 잠시 아들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크게 숨을 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니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짜증 딱지들이 조금씩 떼어지기 시작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딸 옆으로 갔다. 그리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제야 딸 눈가에 포도송이가 송송 맺혔다. 그렇게 엉엉 우는 아이를 앉아주고 달래주다 겨우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사탕도 사주고 다시 원래의 사이좋은 부녀로 돌아왔다.

지하철 타고 가는 길. 가위바위보 게임도 하고. 이어폰 나눠 끼고 사이좋게 음악도 들었다. 오전의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조금 늦었지만. 무사히 돌잔치에도 참석했다. 낯가림이 심한 딸은 이번엔 요조숙녀 모드를 켜고 새초롬이 있었다


아내에게 딸을 보내고. 급하게 아들을 데리고 온 후. 소파에서 기진맥진해 버렸다. 잠시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마냥 순둥이에 느렸던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고집도 늘고 자기주장도 부쩍 늘었다. 하긴 첫째도 이 시기에 그랬었던 것도 같다. 이제 다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인가. 그간 녹슬었던 무기를 재정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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