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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26. 2024

바나나 우유만 빨대 꽂는 게 아냐

빨대 제대로 꽂혔던 날

험난했던 본사 시절,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안에 맞추어 오전에 지시를 받으면 오후까지 결과 보고를 해야 했다. 급히 소집된 회의가 끝나면 그때부터 부서원들 사이에선 기도가 시작되었다. '제발 저 일이 내 일이 아니게 해 주세요.' 하지만 누군가는 맡아야 했고 픈 예감은 비껴가지 않았다.


보통 기획 문서라 함은 천천히 생각을 음미하며 한 땀 한 땀 완성해야 하건만 그건 사치였다. 허공에 떠오르는 단어를 일단 타자로 치기 시작하며 정리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그 당시 성질이 불같기로 유명한 K 부서장은 수시로 나를 불러 완성했냐고 재촉했다. 가뜩이나 조급한 마음이 모터를 달 듯 돌아갔다. 속으론 '내가 누르면 나오는 기계인 줄 아나.' 하며 불만이 차올랐지만 밖으로 드러낼 여유조차 없었다.


급기야 내 뒤에 와서 구두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거 말고. 단락에 논점이 흐릿하잖아. 엔터 치고. 그 위에 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봐.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혁신적 환경개선을 위해.........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위문장과 아래 문장을 바꿔봐. 거기에 네모 박스를 만들고 핵심을 요약해 봐. 아직도 불명확해. 좀 더 삼박 한 내용 없어? 회의 때 다 들었잖아. 아. 시간 없다. 빨리빨리!"


여기는 어디요 나는 누군가. 이미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조금 과장해서 내 안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땀이 흘렀다. 인간이 급박한 위기 상황에 닥치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했던가. 앞뒤 맥락도 없는 지시에도 문서는 완성되어 갔다. 마치 뇌와 손이 분리되어 따로 움직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면 K 부서장의 "됐어!"란 특유의 반박자 느린 외침이 어깨너머로 들렸다. 큰 한숨이 절로 나오고, 풍선 바람이 빠지듯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마치 누군가 두들겨 팬 듯 삭신이 쑤셨다.


몸을 다독일 틈도 없이 얼른 출력해서 오탈자가 없는지만 확인하고 부서장에게 문서를 넘겼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면 동료는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그 당시 우리에게 유행했던 말을 건넸다.


"실배 과장, 오늘 제대로 쪽 빨렸네!"






#라라크루, #갑분글감, #라라크루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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