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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Apr 22. 2023

수고롭고 예민한 드립 커피의 매력

새로운 소비 취미: 드립 커피백 사모으기

나는 커피를 사랑한다.

하지만 카페인에는 취약하다.

이토록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물론 있겠지.)


커피는 현대인의 '생명수'로서 "우선 커피부터 마시고 시작할게요"라는 인터넷 짤방이 유행할 정도로 카페인의 역할이 대단한 음료 중 하나다. 커피 한 잔은 해야 살 것 같으니까. 높은 업무 강도에 시달리며 어젯밤에도 일 생각을 하다가 간신히 잠을 청한 현대인에게 '카페인 수혈'은 필수니까. 그 와중에도 가장 접근성이 높고, 있어 보이는 카페인 음료는 바로 커피니까 말이다.

"내가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전엔 말 걸지 마시오"라는 밈 (meme)도 있고 말이다. (이미지 출처: ArtistryRN)

우리 사회에 편재하고 있는 수많은 커피숍은 현대인들에게 어서 들어와서 잠을 깨고 하루를 시작하라고 속삭인다. 출근길길에 수 없이 보이는 '테이크 아웃 (Take-out) 시 1,000원 할인'이라는 광고판 역시 굉장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는 커피를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마시지 않는다. 나에게 '커피'란 조급한 마음과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한 만병통치약 처방전이 아니라 '여유로움'이라는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마시든 카페에서 마시든, 커피 한 잔은 여유롭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려면 우선 주전자에 물을 끓여야 한다. 캡슐 커피든, 드립 커피든, 흔하디 흔한 믹스 커피든 예외는 없다. 따뜻한 물을 부어주어야 커피가루가 녹아 맛 좋은 커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즉 주전자에 물을 받고 전기를 연결하고 물이 끓는 동안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준비하여 좋아하는 머그잔에 세팅한다는 이 모든 성스러운 행위는 단언컨대 노력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렇게 성실만 마음가짐으로 맛있게 내린 커피를 맛보는 일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방금 언급했듯이 끓인 물이기 때문이다. 100도에 육박하는 음료를 급하다는 이유로 한 입에 털어 넣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대 시도해보지 마시라. 생각보다 많이 위험한 일이다. 절대 경험담은 아니다. 흠흠.) 핵심은 커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여유를 가져야 진정한 커피 맛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나의 애정이 반영되어 최근에는 드립 커피 (Drip coffee)에 빠지고 말았다. 드립 커피는 분쇄한 커피콩을 거름망에 담고, 온수를 통과하여 추출하는 커피다. 유명한 커피숍에서 알려주신 설명서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깔때기에 필터를 깔고 분쇄된 커피 가루의 적정량을 (약 10-15 그램 정도) 담아 팔팔 끓는 물이 아닌 90-93도 사이의 물을 150-200 mL 부어주면 된다. 150-200 mL 면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종이컵 보다 살짝 더 큰 부피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진정한 드립 커피 향을 느끼려면 제시된 원두와 물양의 비율을 준수하여 커피를 내려마시는 게 좋다고 한다. 다른 커피 종류와 달리 사람의 손으로 직접 물 양을 조절해야 하는 수고로움과 수많은 기본 요소에 따라 커피 한 잔의 맛이 좌지우지되는 그 예민함이 좋다.


도심 속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대형 카페 외에도, 에스프레소바, 로스터리 등 다양한 종류의 커피숍이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기회가 될 때마다 - 즉 오후 두 시 이전에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 새로운 원두의 드립 커피 메뉴를 주문하여 맛을 보고 있는데 이 또한 굉장히 재미있는 일상의 탐험으로 자리 잡았다. 한동안 학교 근처에서 맛본 커피 중에는 재스민, 레몬글라스, 허니 그리고 복숭아 노트를 지니고 있는 "콜롬비아 라 미나 게이샤" 커피의 맛에 흠뻑 취했었다. 아이스로 마셨을 때 더 맛이 좋아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꼭 아이스 드립을 부탁드렸다. 그 외에도 비스킷과 볶은 땅콩, 만다린과 청사과 향을 갖고 있는 '칠 리프 블렌디드' 드립 커피를 맛있게 마셨다. ('칠리프'는 어은동에 새로 생긴 에스프레소바 이름이다.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그만큼 잠깐씩 쉬어가며 맛 좋은 커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정말 기쁘다.)

학교 근처에 생긴 에스프레소바 '칠리프.' 다양한 종류의 드립커피 맛도 좋지만 커피와 어울리는 구움과자 디저트도 맛이 좋아서 자주 애용하고 있다.

다양한 커피노트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높은 해상도를 갖추어 커피 향을 구별해 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아직 아는 것도, 맛본 것도 부족해서 커피를 한 입 맛보자마자 '오, 이건 홍차와 다크 초콜릿의 씁쓸한 맛이 강한 거 보니 분명 케냐 AA 마사이 원두겠군!'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연 이런 날이 오긴 올까.) 꼭 모든 원두 종류를 섭렵하여 '마스터 커피 드링커 (master coffee drinker)'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커피 원두를 접할 때마다 원산지, 품종, 볶음 정도와 가공 단계의 다양한 변수에 따라 느낄 수 있는 커피 노트와 향의 묵직함을 구별할 수 있는 섬세함을 갖추고 싶다. 그 미묘한 차이를 느낄 만큼 내공을 쌓아 올리려면 더 많은 양의 커피를 맛봐야 할 텐데, 카페인에 취약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맛을 자세히 느끼려면 예민함이 필요한데, 그 예민함 때문에 카페인에 편협한 체질이 되었다는 아이러니.

신탄진역 근처 <카페 애드립> 잠깐 시간이 남아서 방문한 카페였는데 여유롭게 논문도 읽고(?) 무화과 휘낭시에와 함께 맛 좋은 커피를 마셨다. 사장님 최고 진절하셨다.

요즘엔 또 재미있는 취미가 생겼는데 바로 드립 커피 백을 사모으는 일이다. 대형 커피 체인 외에도 자체적으로 로스터리 공장을 운영하며 볶은 원두를 판매하거나 소량의 원드를 일회용 드립망에 담아 판매하는 경우도 많다. 자취를 하다 보니 비싼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매하거나, 대형 드리퍼, 모카포트, 프렌치 프레스 등 장비를 구매하는 것에 아무래도 제한이 생겨서 선택한 드립 커피인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커피 타임을 가지고 있다. 원두도 드립 커피용 분쇄 원두 대신 일회용 드립백을 구매하고 있는데 결국 필터 종이 사용량도 비슷하고 정확한 원두 정량을 맞추기 위한 노력을 고려했을 때 드립 커피백 구매가 더 실용적이라고 판단하여 드립백을 사모으고 있다.

29CM 를 통해 모모스 커피에서 드립백을 구매했다. 부산에서 굉장히 유명한 카페/로스터리인데 세트 상품 구성도 좋아서 하나는 부모님께 선물드렸다. 큐레이션도 정말 정성스럽다.
여의도 커피앳웍스 카페를 좋아하는데 커피 맛이 좋아서 드립 커피백을 구매했었다. 디카페인 드립 커피도 맛은 그대로 훌륭해서 카페인에 유독 민감한 시기에 애용했다.
효창동 <우스블랑>은 빵뿐만 아니라 커피 맛집이라 유독 자주 방문하고 있는데 언니한테 선물 받은 <효창동 우스블랑> 책과 함께 에티오피아 원두 드립백을 선물 받았다.
<FELT> 커피는 매장에서 마시는 커피 맛도 좋지만, 드립 커피도 향이 좋았다. (좀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채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아직은 가격이 다소 아쉽다.)
제주도에 있는 <크래커스 로스터리>에서도 드립 커피백을 주문해 보았다. 사진과 무대에 본업이자 진심을 갖고 계시던 두 사장님의 스토리와 어우러진 원두 큐레이팅이 인상 깊었다.
"사자커피"로 요명한 <라이언 커피> 드립 백. 가향이 다소 강한 편이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는데 바닐라나 헤이즐넛 향을 좋아한다면 추천이다.
일반 커피숍에서도 많이 보이는 <프릳츠> 베이커리/커피숍의 원두 드립 백.
최근에 싱가폴에 여행 다녀온 친구가 선물 준 <바샤커피> 드립백. 다음달 말에 싱가폴 학회로 출장 계획이 있는데 돌아올 때 선물용으로 잔뜩 사올거다!

감미로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며 정성스럽게 작성된 커피 노트의 큐레이션이 참 즐겁게 느껴진다. 내가 그 모든 향을 느끼고 인지하고 확고한 취향을 기반으로 특정 원두만 찾아 마시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한 종류의 드립백을 주문하고, 도착한 드립백을 하루 한 잔씩 아껴마시며 커피 노트를 정독하, 그 향을 느껴보려고 고군분투할 때 나의 감각이 살아있어서 기쁜 마음이 든다. 여유가 있는 아침에는 식사와 함께, 또는 식사 후 드립 커피를 한 잔 내리며 구독하고 있는 뉴스레터를 정독하거나 오늘 하루 해내야 하는 일들의 To-do list를 정리하곤 한다. 하지만 나 역시 현대인 중 한 명, 박사과정 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 중 한 명이라 매일 이토록 여유를 만끽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바쁜 아침엔 드립 커피 대신 홍차나 다른 믹스 커피를 선택한다. 드립커피는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물을 천천히 내리고 첫 향, 두 번째 맛, 그리고 남은 물로 그 따뜻함을 더 우려먹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고귀한 단계를 서둘러 거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오랜만에 여유를 찾은 주말 아침이었다. 아침 식사 후 노트북을 열고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오늘은 부산 모모스커피의 디카페인 드립백이다. 오후에 커피 약속이 한 번 더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마음도 급하고, 몸도 급해서 컨디션이 좀 안 좋았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너무 복잡해진 심경 때문에 어떤 글이 쏟아져 나올지 가늠이 안되어 글 쓰는 일이 주저되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그때 나에게 밀려오는 생각과 감정을 글로 더 자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 역시 커피 향 가득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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