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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Aug 24. 2019

립스틱

나를 위한 확실한 행복

"화장할 때 입술에 바르는 막대 모양의 색조 연지"

굉장히 보수적인 정의인 듯 하지만 "립스틱 (Lip-stick)"이란 직역한 그대로 입술에 바르는 막대 모양의 색조 화장품이다. 꼭 "립스틱" 말고도 입술에 바르는 화장품 종류는 다양한데 립밤, 립글로스, 립 타투, 립 라커, 립 펜슬 등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고체나 액체의 (또는 그 중간 애매모호한 형태의) 립 제품이 존재한다.


그 형태가 다양한 만큼 립스틱의 색깔 또한 다양하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하늘 아래 같은 립스틱 색깔은 없다"라는 말은 많은 화장품 사용자들이 (특히나 "코덕 (코스메틱 (Cosmetic) 덕후)" 사이에서) 또 하나의 립스틱 구매를 합리화하는데 자주 참조된다. 지구 위 셀 수 없이 많은 립스틱 색깔 중 본인이 "웜톤 (Warm tone)"인지 "쿨톤 (Cool tone)"인지에 따라 어울리는 계열의 색감이 달라지고 (필자도 이 부분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지는 못하지만 '웜톤'은 코랄 (Coral), '쿨톤'은 분홍빛 색조 화장이 어울린다는 공식(?)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 소심하게 한 가지 TMI를 덧붙이자면 필자는 '웜톤'이다.) 계절에 따라 바르고 싶은 (이라고 쓰지만 "사고 싶은"이라고 읽어주시면 된다) 입술 색깔도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웜톤' 피부와 분위기 덕분에(?) 오렌지 빛이 가득한 코랄 화장이 더 어울려 다홍빛이나 주황빛 색감의 립스틱을 애용하는데 그렇다고 일 년 365일 내내 그런 것은 아니다. 날씨가 좀 더워지면 (어울리지 않아도) 분홍 빛이 쨍한 네온 색감의 틴트도 발라보고 싶고, 추운 겨울이 되면 괜히 고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파 진하게 '톤 다운 (Tone-down)'된 버건디 레드 립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이유 없는 취향 변화가 있을 수도 있는데 필자는 얼마 전부터 진자주색 (plum) 색조 화장에 관심을 갖게 되어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샀었다. (사실 이건 그냥 "Hot Pink보다 진한 보라색이 좋아지는" 아이유 병 초기 증상일 수도 있지만. 먼산.)

‘웜톤’에 찰떡인 주황빛 립스틱과 그 반대인 네온빛 분홍 립스틱 (왼쪽) 그리고 F/W시즌만 되면 사게되는 버건디 레드 립스틱 (오른쪽)

립스틱은 질감, 즉 발림성으로도 구분될 수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립 제품의 다양한 제형과도 관련이 있다. 먼저 부드럽게 발리는 "글로시 (Glossy)"타입이 있는 반면 그 정 반대로 건조한 질감의 "매트 (matte)" 타입도 있다. "글로시" 타입은 말 그대로 "립글로스"와 같이 발랐을 때 윤기가 나고 보습효과까지 있어 각질 걱정이 앞서는 건조한 겨울철에 인기가 많다. 하지만 너무 부드러운 발림성 때문에 잘 지워지거나 발색이 뚜렷하지 않아 호불호가 나뉜다. "매트" 타입은 "글로시"와 반대로 색조 '피그먼트 (pigment)'사이에 윤활제 역할을 해주는 기름기가 덜 해 쨍한 발색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입술도 아프다. (역시 No Pain, No Gain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매트 립을 바르고 한두 시간 후면 입술이 잘 갈라지기 때문에 립스틱 구매 전 백화점 1층에서 제품을 미리 발라보고 일정 시간 경과 후 입술 상태를 관찰한 후에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익스트림 (extreme)'한 선택지만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글로시'와 '매트, ' 그 중간의 발림성을 도모하기 위한 '쉬어 샤인'이나 '세미 매트' 제품도 있고, 부드럽지만 강렬한 발색력을 자랑하는 립 라커 제품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상 질감과 발색,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역시 매우 어렵다.


이렇게 질감, 제형, 발색 모두 각양각색이니 정말 하늘 아래 같은 립스틱이 없을 만도 하다. 그런데 설령 같은 립스틱이 있다고 한들 크게 상관없다. 이미 립스틱은 필자에게 (그리고 많은 '코덕'에게) 그 존재 자체로 큰 기쁨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지쳐 '비일상'이라는 탈출구를 찾는 우리들처럼, 립스틱은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우리의 얼굴에 '준(semi)-환골탈태'급 변화를 가져다준다. 일상의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일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는 필자는 '리프레쉬 (refresh)'할 수 있는 일상의 변화를 추구하는데 립스틱은 평소에 작지만 뚜렷한 외적 변화를 불러오는 데에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옷을 사입을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여행을 떠날 수도 있지만 시간과 비용, 그리고 에너지를 고려했을 때 립스틱의 가성비가 가장 훌륭하다. (물론 너무 많이 사면 슬슬 가성비 계산에 오류가 생기겠지만.) 저렴하게는 1-2만 원, 살짝 무리(?)해서는 3-4만 원대에 마음에 쏙 드는 '셀프 선물 (self-treat)'을 할 수 있는데 새로 산 립스틱 박스를 개봉하고 처음 발색해볼 때의 그 느낌은 값을 헤아릴 수 없다. 영롱하고 반짝이는 립스틱 표면을 본인 입술에 가져다 대는 순간 "이 아이는 (립스틱은) 이제 내 것임"을 선언할 수 있고, 앞으로 다 쓸 때까지 함께 기분 좋을 일만 남은 것이다. (사실 립스틱을 바닥까지 다 써본 적은 매우 드물지만 말이다.) 필자는 고생스러웠던 한 학기가 끝나면 친한 친구와 백화점에 가서 여러 가지 색깔의 립스틱을 발라본 후 나름의 허세(?)를 부리며 립스틱을 사온적이 몇 번 있는데 이럴 때도 기분이 참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면세점에서 원하던 색조화장품을 살 수도 있지만 매장에서 제 값을 주고 종이가방에 몇 가지 신상 제품 샘플까지 함께 받아 나오면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또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자주 언급하지만 “과유불급의 법칙”을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면 립스틱 소비는 기분을 '업 (up)'시켜줄 수 있는 합리적이고 귀여운(?) 소비라고 생각한다.


립스틱 소비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학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립스틱" 소비량은 경기불황 바로미터 (Barometer)로 해석될 수 있는데 립스틱 지수는 "경기가 불황일수록 소비자들이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는 사치품인 립스틱 판매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지수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경제, 2019) 물론 립스틱 값을 "비교적 싼 값"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그 외 사치품, 예를 들면 명품 핸드백이나 지갑, 액세서리 등에 비하면 "비교적"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 마디로 대체 사치품에 비해 "가성비"가 좋다는 것이다. 물론 '립스틱 지수'의 신뢰도는 예전만치 못할 수도 있다. '립스틱 지수'의 유래는 1930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인해 립스틱 수요가 급격히 늘었을 때인데 요즘은 남녀노소 불문 '뷰티 (Beauty)'에 관심이 많아 색조 화장품, 특히 립스틱의 수요가 꾸준히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를 기반으로 한 경제지수이지만 그래도 '립스틱 지수'는 옛말이라는 평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경제 지수야말로 립스틱이 개인에게 주는 만족감을 잘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크지 않아도 확실하게 선물할 수 있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가꾸며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치품"과 "가성비"는 서로 상반되는 느낌도 없지 않다. 두 단어가 함께 쓰인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외모를 가꾸면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화장품 코너엔 품절 대란이 휩쓸고 간 제품이 수두룩하고 면세점에서 마저 입고 대기를 해야 하는 '머스트 해브 (Must-Have)' 아이템도 참 많다. 이렇게 우리 사회가 '뷰티'제품에 열정과 관심을 보인 덕분에 'K-Beauty' 역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고, 그에 따라 국내 제품 수요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또한 나스 (NARS)와 같은 해외 브랜드마저 특정 블러시 제품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단독으로 선 출시하고 3 개월 간 단독 판매를 할 정도니 우리나라의 '코덕' 열정은 알아줄만하다. 물론 외적인 모습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자존감과 생활 속 에너지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얼마나 건강할지에 대해서는 미리 단정 짓기 어렵다. 하지만 화장품과 립스틱을 좋아한다고 너무 색안경을 끼고 판단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꾸밈에서 자유롭고 싶은 만큼 꾸미면서도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도 존재하고, 작지만 확실한 구매를 통해 스스로에게 '리워딩 (rewarding)'한 소비를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개인의 선택이자 취향이기 때문이다.


크기도 작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소소하지만 립스틱은 절대로 ‘소확행’이 아니다. 립스틱은 본인의 기분과 취향에 맞춰 ‘전략적으로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전확행”의 완벽한 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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