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이 아닌 관광객으로서의 뉴욕 탐방기 (2) - 뉴욕 스테이크
너무 많은 음식이 뉴욕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특히 본인의 지갑 사정이 비교적 여유가 있는 경우) 메뉴에는 바로 스테이크가 있다. 뉴욕 스테이크는 드라이에이징 방식으로 숙성하는 것이 특징인데 덕분에 깊은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고, 스테이크와 함께 곁들여 먹는 "사이드 디시 (Side dish)"가 다양해서 크림 스피니치, 버섯, 브로콜리와 같은 "고기반찬"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매력을 갖고 있다. 게다가 뉴욕 스테이크는 "맛" 뿐만 아니라 길고 긴 "역사"로 요식업계에서 승부를 보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의 스테이크 하우스 들은 대부분 1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뉴욕을 대표하는 스테이크 하우스는 피터 루거 (Peter Luger Steak House), 킨스 (Keen's Steakhouse), 그리고 울프강 (Wolfgang's Steakhouse)이 있는데 피터 루거는 1887년 설립되어 138년 역사를, 킨스는 그보다도 2년 먼저 장사를 시작하여 140년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붉은 고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리고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닭고기, 돼지고기, 그다음으로 소고기를 선호한다.) 필자 역시 뉴욕에 와서 스테이크를 맛볼 기회가 있었다. "뉴욕에 왔으니 스테이크 하우스 한 번은 가야지!" 싶은 마음도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데이트 장소를 모색하다 선택한 메뉴였다. 가장 유명한 메뉴인 포터하우스나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하면 2인 기준 적어도 $250 정도 (안타깝게도 팁과 세금을 제외한 금액이다.) 지불해야 하는데 워낙 가격대가 있는 음식이기 때문에 평소에 캐주얼하게 즐기기엔 어려움이 있다. 오랜 전통과 뛰어난 품질, 그리고 독특하고 로맨틱한 분위기 덕분에 뉴욕의 많은 연인 그리고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뉴욕 스테이크 하우스. 이번 글에서는 뉴욕 스테이크의 매력과 나의 스테이크 하우스 후기를 공유해보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장 유명한 3대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는데 필자의 경우 (순서대로 나열해 보자면) 킨스, 피터 루거, 그리고 런치 메뉴 가성비로 손꼽히는 맛집인 갤러거 스테이크 하우스에 다녀왔다. (아직 울프강 스테이크 하우스는 다녀오지 못했는데 이곳은 서울 청담점도 운영 중이고 뉴욕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쯤은 또 기회가 닿지 않을까 싶다.) 먼저 필자가 뉴욕 스테이크를 가장 처음 맛본 킨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킨스는 1885년 설립된 맨해튼 전통 스테이크 하우스이고 위치는 뉴욕의 32번가 코리아 타운과 굉장히 밀접한 36번가에 자리 잡고 있다. 킨스는 내가 다녀온 스테이크 하우스 중 가장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곳이었는데 특히 천장에 걸린 수백 개, 아니 수천 개의 파이프 컬렉션이 인상적이었다. 정갈한 식탁보나 식기 세팅은 말할 것도 없고 입구부터 내부 식사 장소까지 어둡지만 디테일이 인상 깊었고, 벽을 가득 채운 액자 속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풍부했다.
레스토랑 내부 구경을 마쳤으면 서버를 따라 자리에 앉고 본격적으로 메뉴판을 정독하며 음식을 주문하면 된다. 사실 메뉴판을 "정독"할 것도 없는 것이 이곳에서 맛봐야 하는 메뉴는 너무 당연히도 포터하우스 또는 드라이에이징 티본스테이크다. 미묘하게 다른 두 종류의 스테이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두 스테이크는 모두 소의 허리 부위에서 잘라내어 중앙에 T자형 뼈가 있고 한쪽에는 안심, 다른 한쪽에는 등심이 붙어있는 특징을 갖고 있는 스테이크다. 결국 필레 미뇽 (Filet mignon, 안심)과 뉴욕 스트립 (New York strip, sirloin이라고 알려진 등심) 중 하나만 선택하는 대신 둘 다 먹고 싶은 날 선택하는 "욕심쟁이" 메뉴이다. (안심과 등심 스테이크를 따로 주문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고 맛도 좋기 때문에 장점이 큰 메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포터하우스와 티보는 무게와 크기의 차이 때문에 달라지는데 포터하우스가 일반적으로 더 두툼하고 안심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더 비싸다.) 안심과 등심의 조화를 즐기며 넉넉히 나눠 먹고 싶은 경우에는 포터하우스, 반대로 소고기 육즙의 풍미가 더 강조되는 등심 위주로 맛보고 싶다면 티본스테이크를 고르면 된다.
우리는 포터하우스 스테이크 2인분과 크림드 스피니치, 그리고 레드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소고기와 레드 와인의 환상적인 조합"이라는 이유 외에도 오래간만에 즐기는 뉴욕 데이트를 위해 우리는 테이블 담당 서버에게 페어링 좋은 레드 와인 추천을 부탁했고 덕분에 (다소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진심을 담아) 금상첨화의 뉴욕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었다. 이후 다른 집 고기도 먹어보고 회고하며 (retrospectively) 더 느낀 것은 킨스 스테이크 하우스의 스테이크가 가장 담백하다는 점이다. 보통 미국에서 외식을 하게 되면 한국인 입맛에는 유독 견디기 힘든 염도 탓에 "less salt please (소금 간을 약하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할 때가 잦은데,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고기의 기본간이 약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그래서 더 좋았다는 의미다!) 이날 선택한 사이드 디쉬는 느끼한 버터 맛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크림드 스피니치 (Creamed spinach)였는데 말 그대로 크림에 버무린 시금치였다. 느끼한 고기에 느끼한 야채를 곁들여 먹는 게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약간의 입안에서 흐물거리며 퍼지는 시금치의 향과 식감이 굉장히 조화롭게 느껴졌다. 사실 먹을 때는 맛있어서 흡입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입이 굉장히 느끼해지긴 했다. 물론 덕분에(?) 젤라토 같은 상큼한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훌륭한 핑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맛과 분위기 모두 완벽했던 킨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의 데이트를 마치고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아 피터 루거에 다녀오게 되었다. 시간이 부족했던 이유도 있고, 붉은 고기를 못 먹는(다고 스스로 주장하던) 내가 생각보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한 군데 더 시도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로 향한 곳은 바로 브루클린에 위치한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였다.
1887년 설립되어 킨스 스테이크 하우스와 마찬가지로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는 그만큼 유서 깊은 레스토랑이다. 이 때문에 맨해튼에서 머무는 관광객들에게 다소 거리가 있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피터 루거의 스테이크를 맛보기 위해 브루클린을 방문하고 있다. 이곳 역시 대표 메뉴는 포터하우스 스테이크이고, 한 달 동안 드라이에이징한 고급 소고기를 사용한다고 한다. 또 한 가지 특별했던 것은 식전 빵과 함께 "Our Own Peter Luger Steak House Sauce" 즉,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직접 만든 수제 스테이크 소스가 함께 서빙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고기일수록 양념 맛을 더하는 대신 고기 그 자체의 육향과 식감을 즐기는 편이긴 하지만 어딘가 매콤하면서도 토마토와 카레 향이 섞인 듯 한 피터루거의 수제 소스와 함께 스테이크를 맛 보니 같은 메뉴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레스토랑 로비에서는 소스를 따로 판매하고 있기도 했다.)
갑자기 맛집 블로거로 빙의한 우리는 직접 비교를 위해 피터 루거에서도 같은 메뉴인 포터하우스 스테이크와 크림드 스피니치를 주문했다. (이곳은 베이컨 구이와 생 토마토와 양파를 잘라 서빙해 주는 "고기반찬" 메뉴들도 유명한데 우리는 고기에 집중하고 싶기도 했고 크게 끌리지 않아 주문하지 않았다.) 주문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자 나이 지긋한 노년의 신사 모습을 한 서버가 버터 국물 속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아 가져다주셨다. 보기만 해도 열감이 느껴지는 접시는 물이 닿을 때마다 "칙" 소리를 냈고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킨스에서 먹었던 스테이크는 고기 온도가 살짝 아쉬웠구나 하고 기억이 났다. 커다란 숟가락을 집게처럼 집어 들고 각자의 앞접시에 안심 한 조각, 그리고 등심 한 조각을 올린 후 아직도 뜨겁게 끓고 있는 버터 국물을 넉넉하게 끼얹어주셨다.
완벽하게 구워진 안심을 한 조각 먹어봤다. 크림드 스피니치를 한 포크 찍어서 옆에 있는 등심 조각과 함께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게 바로 뉴욕의 스테이크 맛이구나! 하고 말이다. 피터 루거의 스테이크는 버터향이 정말 강했고 (접시 위에서 버터가 말 그대로 끓고 있다) 지방 비율도 적당해서 고소하고 씹는 맛도 좋았다. 그러다 앞서 소개한 피터 루거 만의 수제 소스를 곁들여 스테이크를 한 입 또 먹어보면 새로운 요리를 먹는 듯했다. 역시 괜히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게 아니구나 싶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집하다 보면 다소 불편한 점도 생기는 것이 피터 루거는 현금 결제를 선호하기 때문에 카드 사용이 제한적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다행히 현대화가 되었는지 카드 단말기에 계산이 가능했지만 여전히 대가족이 식사를 와서 몇 백 불씩 현금으로 계산하는 테이블도 많이 봤다.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매력이 가득한 할아버지 웨이터와의 스몰톡 (small talk)과 마지막에 선물 받은 식후 디저트 용 초콜릿 덕분에 전체적으로 아주 즐겁고 재미있는 경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갤러거 스테이크 하우스 (Gallagher’s Steakhouse NYC) 다. 굉장히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이곳은 52번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스테이크 전문점이다. 합리적인 가격의 런치코스가 유명하기 때문에 예산이 다소 부족하거나 피터 루거를 맛보기 위해 브루클린까지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여행자들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는 곳이다. 갤러거에서는 3코스 런치 스페셜을 세전 34달러에 즐길 수 있는데 전채 (수프 또는 샐러드 중 택 1), 메인 (스테이크), 디저트 (치즈케이크, 아이스크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굉장히 알차고 든든한 메뉴다. 메인의 경우 어느 정도 금액을 더 추가하면 더 품질이 좋은 필레 미뇽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는데 하나씩 시켜봐도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예약도 필수인 갤러거 스테이크 하우스는 뉴욕을 방문한 언니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다녀온 곳이었다. 어플로 예약을 마치고 "생일 축하 식사"라는 코멘트를 남겼더니 마지막에 각자 디저트를 하나씩 골랐는데도 무료로 제공되는 (on the house) 초콜릿 라바 케이크까지 생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직접 감독하고 주연을 맡은 존 패브로의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참 재밌게 봤는데 볼 때마다 유명한 음식 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았던 (하지만 극 중에서 가장 먹어보고 싶었던 디저트인) 초콜릿 라바 케이크가 궁금했었다. 언니 덕분에 케이크 속 초콜릿 필링이 제대로 흘러내리는 케이크를 맛볼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자매는 스테이크를 각자 한 그릇씩 비우고도 케이크 세 조각을 모두 해치웠다. 너무 배불러서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근처 뉴욕 현대 미술관 (MoMA)부터 소호까지 걷고 또 걸은 하루였다.)
주면 누구보다 맛있게 먹지만 평소에 자주 즐기지는 못해서 스테이크에 대한 이해도나 배경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세 번 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품질 좋은 소고기와 드라이에이징 숙성 방법, 그리고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레스토랑의 분위기 덕분에 뉴욕의 스테이크 하우스는 근거 있는 유명세를 탄게 분명하다. 그것도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어디가 제일 좋았냐?"라고 물어본다면 (다소 재미없는 대답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뉴욕에 놀러 왔는데 제한된 시간 때문에 한 번 밖에 기회가 없다면 가장 정석적인 피터 루거를, 지갑 사정을 포기하지 않고도 양질의 소고기 요리를 풀코스로 즐기는 일석이조 호강을 누리고 싶다면 갤러거를, 그리고 소중한 연인과 로맨틱한 분위기 속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면 킨스 스테이크 하우스를 추천하고 싶다. 뉴욕에서 소중한 자원을 투자하는 한 끼 식사인만큼 각자의 시간, 장소, 상황에 알맞은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독자 여러분 모두 기억에 남을 훌륭한 한 끼 하실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