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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포닥의 보스턴 주말 일기

나를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도시, 보스턴 캠브릿지

by 성급한뭉클쟁이

"다시, 뉴욕"이라는 제목의 브런치북 연재글인데 보스턴이라니?! 싶을 수도 있지만 미국에 연구하러 온, 특히 생명과학 분야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포닥으로서 보스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스턴은 연구자에게는 꿈의 도시와도 같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대학이 두 곳이나 있고, 이곳에서 양성된 인재들이 모여 연구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 중심지 (medical hub) 역시 보스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학계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도 발달한 곳이라 생명의학 (biomedical)과 제약 (pharmaceutical) 회사들의 본사가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하게 자리싸움을 펼치고 있는데 보스턴에서 공부를 마친 실력 있는 연구자들을 데려가기 위한 전략인 것 같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나 역시 보스턴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Bostonian" (보스턴에서 사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으로서 연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가 굉장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뛰어난 학생들이 한 도시에 모여 공부하고, 실험하고, 토론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물론 내가 공부했던 학교에서도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지만 학부생활을 마치고 이왕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라면 가장 큰 물에서 공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막연한 꿈을 품게 된 것도 바로 7년 전 여름 짧게나마 보스턴에 방문했을 때였다.


2018년 여름, 함께 인턴 생활을 이어가던 룸메이트 친구와 보스턴으로 주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하버드 의대 (Harvard Medical School)에서 연구 중인 친구가 있었고, 룸메이트는 MIT에서 교환 학기를 보내고 있던 대학 동기가 있었다. 뉴욕에서 버스를 타고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면 당일 오후는 하버드 투어, 다음날은 MIT 투어를 하고 보스턴 여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계획한 일정이었다. (당시 나와 룸메이트 둘 다 공대생이서 그런지(?) 보스턴에서 가장 다녀오고 싶은 두 곳이 바로 하버드와 MIT였다.. 물론 퀸시 마켓 (Quincy Market)에서 랍스터 샌드위치도 먹고, ICA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Boston 미술관도 짧게나마 다녀왔지만 말이다.)


사실 그때의 기억이 아주 뚜렷하지는 않다. 하버드 캠퍼스의 붉은 벽돌을 감상하며 존 하버드 (John Harvard) 동상의 발을 문질렀고, MIT 캠퍼스의 Simmons Hall, Stata Center 등 기괴하지만 독특한 건축물을 감상하며 찰스강 (Charles River) 근처를 거닐었다. 다만 캠브릿지 동네를 산책하며 누가 봐도 공대생인 학생들과 그 들이 자유롭게 캠퍼스를 거닐며 정원, 도서관, 카페를 가리지 않고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이곳의 일원이 되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당시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 (Mark Zuckerberg)의 하버드 대학 학창 시절과 창업 스토리를 담은 "The Social Network" 영화를 굉장히 재밌게 감상한 직후라 캠브릿지 동네의 학구적인 분위기가 더욱 마음에 들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보스턴 (명문대) 투어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유학 지원에 높은 점수가 필수인 GRE 문제집을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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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MIT 학생 기숙사 Simmons Hall, 오른쪽은 Harvard 캠퍼스 내부에 있는 정원이다. 고요하지만 자세히보면 학생들로 가득차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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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첫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거금을 투자해서 랍스터롤과 클램차우더를 맛봤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우리에게는 더없이 비싼 메뉴였겠지만 New England의 전통음식을 맛보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유학을 가지 못했다. 7년 전 여름 인턴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대 대학원 입시를 마쳤고, 석사 과정을 밟는 내내 유학 생활을 꿈꿨던 것도 사실이지만 2020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유학 길을 떠났던 친구들이 전부 다 한국으로 돌아왔고, 나 역시 뚜렷한 연구적 목표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저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 만으로는 성공적인 입시 성적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한국 지도교수님께서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덕분에 같은 연구실에 남아 무사히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대전에서 대학원 공부를 이어가며 유학은 글렀으니 포닥이라도 보스턴으로 나오자! 는 것이 나의 다음 목표였다. 그래서 2023년 가을, 플로리다에서 짧은 교환 학기를 보내면서 첫 번째로 방문했던 도시 역시 보스턴이었다. 당시 MIT 박사 말년차였던 친구들과 연구실 선배들이 먼저 보스턴 아동병원 (Boston Children's Hospital)에서 포닥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만나면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는 하버드에 재학 중이던 친구가 이미 졸업한 상황이라 MIT 캠퍼스 근처에서만 머물렀지만 덕분에 찰스강 근처를 실컷 산책하고, 보스턴 시내로 내려가 공원과 쇼핑몰, 보스턴을 대표하는 Tatte Bakery와 Flour 카페에서 브런치도 먹고,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사 먹으며 보스턴에 살게 되면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갖게 될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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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Cambridge 쪽에서 바라본 보스턴의 모습. 가장 높에 우뚝 서있는 건물은 Prudential Center다. 오른쪽은 보스턴에서 바라본 캠브릿지 MIT 캠퍼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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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친구를 만나 캠퍼스 투어를 하기 전에 Flour Cafe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신문을 읽었다. 수식을 풀어 해석하면 "MIT"가 되는 공책을 판매하고 있는 MIT 기념품 샵

실제로 박사과정 졸업 학기 동안 보스턴에 있는 학교와 연구소의 많은 랩에 연락을 돌렸다. 면역학을 위주로 다루는 Ragon Institute의 젊은 교수들 또는 풍족한 연구비로 대규모 프로젝트에 노력을 투자하는 Broad Institute의 연구팀, 그리고 MIT 생물공학 분야의 (Bioengineering, BE) 대가 교수님께도 컨택했다.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보스턴에 있는 연구실들로부터는 합격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다.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던 것이 이유가 워낙 다양했기 때문이다. 연구실 재정 또는 인사 상황도 천차만별이고, 필자가 공부했던 분야와 핏 (fit)이 안 맞기도 했다. 나 역시 신경 썼던 부분은 분야 특성상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적어도 5년 이상 걸리는 연구실이 많아서 내가 포닥 경력을 통해 얻고 싶은 진로적 목표들을 고려했을 때 어느 연구실이 가장 적합할지 고민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보스턴에서 기차로 4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대도시인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RNA 조절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


돌이켜봤을 때 나에게 많은 꿈을 안겨준 보스턴을 또 한 번 방문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소중한 사람의 모교인 MIT 캠퍼스를 더 자세히 구경하고 추억의 장소들을 함께 둘러보기 위한 일정이었다. 대학원생 기숙사 건물부터, 실험실 건물, 논문 작업이 바빠질 때면 급하게 포장해서 점심 한 끼를 때우던 단골 샌드위치 카페, 학위 논문심사를 마치고 연구실 동료들과 다녀온 레스토랑 등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으며 함께 거닐기 좋은 코스로 실컷 산책했다. 학생증 찬스를 통해 기념품 샵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후드티 선물도 받고, MIT 박물관 역시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더욱 알찬 여행이었다! 캠퍼스를 구경하다가 나 역시 포닥 면접을 봤던 연구소 건물이 등장할 때면 (살짝 가슴 아프지만)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상상해 보았다, 뉴욕이 아닌 보스턴으로 포닥을 왔다면 또 얼마나 다른 일상이 되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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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연구비로 대형 프로젝트를 담당하여 수준 높은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Broad와 Ragon Institute. 후자의 경우 나의 관심 분야인 면역분야 연구에 더 집중하고 있다

캠퍼스 투어를 실컷 하고 찰스강 북쪽에서 다리를 건너 캠브릿지가 아닌 보스턴에서 시내 탐방을 이어갔다. 하버드와 MIT 학생들의 "다운타운"인 Newburry Street과 쇼핑몰 Prudential Center를 구경했고 ($175 이하 의류잡화에 대해서는 판매세를 청구하지 않는 매사추세츠주 세법 덕분에 뉴욕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캐시미어 니트도 구매했다!) 보스턴의 다양한 문화권의 유명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특히 보스턴 북동쪽의 항구인 North End에는 퀸시 마켓과 더불어 이탈리안 공동체가 깊은 역사를 자랑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곳의 해산물 파스타와 카놀리 (Cannoli)는 보스턴에서 반드시 맛봐야 하는 진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2018년에 방문한 ICA Boston, 2023년에 다녀온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 이어 Museum of Fine Arts (MFA), Boston 미술관 전시를 구경했다. 마침 제일 좋아하는 화가인 반 고흐 특별전이 9월 7일까지 열리고 있었는데 전시 막바지에 (이번에도 학생증 찬스를 활용해서!) 다녀올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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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2023년에 방문한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의 중정, 오른쪽은 2025년에 방문한 MFA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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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생긴 MIT Museum도 구경했다. 공대스러운 로봇뿐만 아니라 생명과학/공학 분야 연구 주제인 CRISPR/Cas 효소, AAV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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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를 대표하는 전경과 학교를 상징하는 뱃지.
IMG_8423.JPG 2년 전에도 찾았던 캠브릿지의 대표 카페 (중 한 곳인) Flour Cafe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대학원생 시절 자주 먹었다는 샌드위치와 대표 빵인 Sticky Bun을 골라줬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세 번이나 같은 곳을 방문하는 건 나에게도 잦은 일은 아니다. 내가 유독 보스턴을 여러 번 찾아간 이유는 이곳에서 공부했던, 공부 중인, 그리고 앞으로 공부할 주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인 것 같다. 매번 그 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스턴 생활에 대한 꿈을 키웠고, 나중에는 그 추억을 공유하며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문한 보스턴에서 또 한 번 이곳의 학구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엘리트주의 (elitism)라고 칭할 수 있지만 나는 보스턴의, 좀 더 정확이 말하자면 캠브릿지의 엘리트 의식을 좋아한다.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예쁜 일일 수 있는지, 개인의 열정을 바탕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그 맑은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일깨워주는 이 도시의 분위기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올 때마다 질투가 나는 곳이다. 나 역시 (꽤 많이)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곳의 일원이 되어 연구해보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 번째로 방문한, 특히 뉴욕에서 포닥 생활을 이어가다가 마주한 보스턴의 모습을 보며 어찌 보면 당장 혼자서는 보스턴이 아닌 뉴욕에서 연구하고 있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학생으로서는 학구적인 분위기에 몰두하여 조용하고 차분한 캠브릿지에서 생활하는 게 좋았을 것 같고, 포닥으로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면 꽤나 외롭고 심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뉴욕 그 자체가 기준이 되어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도시의 규모나 대중교통의 편리성, 그리고 주변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성향등을 고려했을 때 보스턴은 내가 공부했던 대전과 비슷한 모습이 참 많은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색다른 곳에서 생활해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뉴욕이 좋은 선택지였다는 생각이 한 번 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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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이름이 "촉매"거나 주기율표로 학교 이름 철자를 적어내어도 마냥 사랑스럽고 멋있는 곳은 MIT가 유일할 것 같다!

세 번째 보스턴 여행을 마침과 동시에 분명 다시 올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당장 뉴욕에서 연구하면서 공동연구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학회나 세미나 일정, 또는 짧게 주말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아직 대학원생이거나 포닥으로서 연구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반가운 만남을 위해 기차 네 시간 정도는 쉽게 탈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보스턴 방문 일정에는 내가 또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해진다. 매번 달라진 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다음에는 나의 신분(?) 그리고 동행자, 구체적으로 어떤 동네를 탐방하며 어떤 레스토랑을 선택할지, 어떤 분야의 연구자들과 소통하며 어떤 베이커리를 골라 아침 커피를 마시게 될지 궁금해지고 설레는 마음이다. 보스턴은 나를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도시다. 다음 여행까지 또 열심히 연구하다가 놀러 갈(?)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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