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뻐하는 나의 읽는 모습
얼마 전 친구가 "뉴욕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이 뭐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과장을 보태지 않고) 그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뉴욕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좋다고 답 했다. 하지만 좀 더 정성 어린 대답을 위해 고민해 본 결과 뉴욕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은 바로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실컷 발현해 주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국제적인 환경에서 외국어로 일하는 일이 즐겁다. 어렸을 때 8년 넘게 해외 생활을 한 덕분에 미국 포닥을 준비하며 문화적 그리고 언어적 장벽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특히나 스스로 한국어로 일 할 때 비교적 딱딱한 번역체를 구사하고 약간은(?) 소심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영어로 소통할 때 더욱 프로페셔널하고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을 좋아한다. 그 외에도 굳이 더 밝게 인사를 나누고, 주변 사람들과 더 솔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린 마음으로 실컷 대화를 나누며 상대방과 연대감을 쌓아 올리는 그 행위 자체이자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모습을 참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예뻐하는 나의 모습은 바로 읽는 모습이다. 일기장이나 브런치에 직접 글을 많이 "쓰기"도 하지만 나는 읽는 일도 좋아한다. 나는 항상 읽는 것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호기심이 많아서 더 알고 싶어 했다. 아는 것이 많다는 (knowledgeable) 하다는 건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했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또는 정해진 해가 없는 질문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책을 귀하게 여겼다. 게다가 평소 존경하는 사람의 책 추천 또는 선물에 대해서는 놓칠 수 없다는 욕심까지 들곤 했다. 일종의 "포모 (FOMO; Fear Of Missing Out) 증후군"이라고 해야 하나. 쉽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은 모두 누리는 좋은 읽을거리를 놓칠까과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 말이다.
안타깝게도 대학원 생활이 깊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지게 되었다. 능동적으로 책을 손에 쥐고 한 페이지씩 넘겨가며 활자를 읽어나가는 능동적인 독서를 대신해서 핸드폰 속 어플만 열면 내가 재밌어할 콘텐츠들을 직접 떠먹여 주는 수동적인 영상 시청을 택했다. 매일같이 짧은 영상에 절여져 스크롤만 내리다 보니 뇌는 잠시나마 즐거울 수도 있지만 건조해진 눈, 뻐근한 어깨, 그리고 한두 시간 넘게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극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리게 된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읽는 내가 예뻤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다 더 능동적으로 채우기 위한 노력이 기특해서 스스로 무언가 재밌게 집중해서 읽고 나면 큰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모습을 뉴욕에서는 훨씬 더 많이 마주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왜 하필 뉴욕에서 더 많이 읽게 되었을까? 물론 예전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읽던 시절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던 석사 1-2년 차 때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 코로나19 때문일 수도 있고, 답답한 연구실을 벗어나고자 했던 필자의 현실 도피 전략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때 일기도 제일 많이 썼고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어 첫 글을 썼다가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도대체 2019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 와서 다시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어떤 요소들이 나로 하여금 다시 책을 손에 쥐게 만들었을까?
먼저 공공장소에서의 불안정한 인터넷 연결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집 또는 연구실에는 어느 곳보다 빵빵한 인터넷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웬만한 야외에서도 당장 사용 중인 스마트폰 요금제로 얼마든지 인터넷에 연결되어 필요한 정보를 모색할 수 있다. 다만... 지하철에서는 어림도 없다. 물론 가끔씩! 터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차가 역에 멈춰서 사람들이 타고 내릴 때 약간의 신호망이 닿는 경우가 있다. (보통 이때 답장하려던 메시지 전송을 시도하곤 한다.) 하지만 지하 터널 속에서 이동할 때는 인터넷 연결이 안 돼서 핸드폰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SOS" 시그널이 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의 경우 직장이 컬럼비아 대학의 메디컬 센터인 168가인데 보통 "다운타운, " 즉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적어도 50가보다 아랫동네다. 결국 연구실이 아닌 어딘가에 도착하려면 최소 백 개 이상의 블록을 여행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3-40분이 넘는 시간 내내 인터넷 없이 이동하려면 생각보다 심심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뉴욕에서는 인터넷 연결을 통한 끊임없는 스크롤을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꼭 필요했고 나에게 훌륭한 선택지는 바로 "독서"였다.
역시나 아주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평소에 책 한 권 정도 들고 다니는 건 일도 아니고 워낙 윗동네에서부터 이동하다 보니 대부분의 경우 앉아서 이동할 수 있어 책을 읽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특히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책을 "하드 커버 (hard cover)" 또는 "페이퍼 백 (paperback)"으로 구분 지어 판매하는데 후자의 경우 굉장히 얇고 가벼운 재활용 용지를 사용한다. 그저 에코백에 쑤셔 넣으면 하루 종일 심심할 일 없이 언제 어디서든 챙겨 나온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 선물 받은 아마존 기프트 카드로 이북 리더기인 킨들 (Kindle)을 구매했는데 책 한 권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은 날에는 핸드폰과 함께 킨들을 챙기면 된다. 물론 아직까지 종이의 질감을 느끼고 때로는 오해를 살만큼(?) 책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하지만 도시 생활을 하면서 이북 리더기는 큰 도움을 준다.
휴대성 외에도 킨들을 애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뉴욕 공립 도서관의 전자도서 대여 시스템 때문이다. 뉴욕 공립 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 NYPL)은 브라이언트파크 뒤편 외에도 도심 속 곳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직접 방문해서 읽고 싶은 책을 빌릴 수도 있지만 NYPL 어플에 접속하면 원하는 전자책을 길게는 3주까지 대여할 수 있다. 심지어 아마존 계정과 연동시켜 두면 곧바로 내가 사용하는 킨들 기기에 동기화되기 때문에 따로 거쳐야 할 번거로운 단계도 없다. 뉴욕에 살다 보면 독서하지 않을 핑계를 또 한 번 잃게 된다.
또한 뉴욕에는 서점이 참 많다. Barnes & Noble, Strand Bookstore와 같은 대형 서점 외에도 많은 동네 서점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고 도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도 굉장히 많아서 신간을 곧바로 구매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아무래도 환율을 고려하면 미국의 책 값이 한국보다 훨씬 더 비싼 것 같다. 책 표지 디자인도 예쁘고 소장 가치도 충분하지만 한 권에 $30을 훌쩍 넘기는 책도 굉장히 많다.) 중고 도서 섹션을 따로 구경하기도 좋다. 실제로 길을 걷다 중고 서적을 판매하는 책꽂이를 구경하다가 가격도 괜찮고 내용도 재밌어 보이는 책을 $3-4에 구입한 적이 많다. 평소에 읽고 싶던 책 리스트에 있던 항목은 아니어도 시간 때우기 용, 즉 쉬운 읽을거리를 위한 오락거리를 구매하는 느낌과도 같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책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날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세렌디피티 (serendipity)"를 만끽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도심 속 어딜 가든 책에 몰두하고 있는 예쁜 모습들이 참 많이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나 역시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고 걷는 대신, 독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뉴욕에 와서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도 출근 셔틀에 타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나서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들, 이른 아침부터 이메일 답장에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책을 꺼내 잠깐이라도 몇 페이지를 넘기는 누군가를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그 이후로 킨들을 다시 꺼냈다. 그 이후로 도시를 여행하는 중 서점을 발견하게 되면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골라서 사 읽기 시작했다. 기꺼이 책을 빌려주는 친구도 사귀었다. 그렇게 잔물결처럼 나 역시 뉴욕에서 독서 광이 되겠다는 동기부여를 품게 되었다.
앞으로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계속해서 많은 책을 섭렵하고 싶다. 여기서는 지하철에서든 공원에서든 카페에서든 실컷 독서할 수 있는 환경도 무한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한글책이 그리운 순간들도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손님이 왔을 때 예상치 못한 한글 에세이집을 선물 받았는데 정말 기뻤다. 한국 도서 특유의 책 냄새와 (미국과는 분명 또 다르다.) 각진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감각이 오랜만이라 더욱 좋았어서 다음부터는 누군가 한국에서 선물을 챙겨 온다는 호의를 베풀면 읽고 싶은 책 한 권씩만 가져 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외 이사를 고려하면 절대 짐을 늘리면 안 되는데 폭발한 책 욕심 때문에 큰일이다. 모르겠다, 돌아갈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로컬 하게 구할 수 있는 영문 책도 많이 읽으며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더 다양한 독서 목록을 만끽하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뉴욕 생활을 더욱 다채롭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책 "욕심"은 "욕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폭발한 나의 독서 잠재력을 계속해서 펼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