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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Sep 06. 2024

어떻게 오셨어요?

진짜 경찰관과 미래 경찰관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


열명 정도 앉은 둘러앉은 테이블은 시간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듯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은 희진에게 향했다. 얼굴이 새 빨개진 상태로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그녀. 본부장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한 손은 쫙 피고 다른 한 손은 주먹을 만들어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애 안 낳은 여자들은 주기적으로 욕구를 풀어줘야 돼. 저기 신 차장 봐. 애를 세명 낳아놓으니 저렇게 넉살이 좋잖아."


모두의 시선이 옆 테이블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는 아줌마 차장님에게 향했다. 그때 내 시선은 희진에게 향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희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옆으로 가서 손이라고 잡아주고 싶었지만 비밀연애 중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본부장이 더 이상 희진에게 말을 걸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


다행히 본부장이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꼰대 본부장 탓에 회포를 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이 2차로 몰려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사라진 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

"어디냐고."

"비겁한 놈."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만 아니었다면 다른 사내커플처럼 평범하게 연애하다 결혼해서 잘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만 희진은 너무 예민했기에 결론은 같았을 수도 있다. 이후 희진은 회사에서 나를 본 척 만 척하더니 돌연 퇴사해 버렸다. 다른 입사동기를 통해 그녀의 SNS주소를 알게 됐는데, 여행을 다니며 직장생활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앨리스의 등장으로 한동안 희진을 생각했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었지만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날에 대해 변명이라고 하고 싶었다. 본부장에게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작은 복수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본부장 옆에 붙어 계속 술을 먹였다. 소주 1병이 주량이지만 3병을 내리 마시며 본부장의 술잔도 계속 채웠다.


여직원들 어깨에 올라갔던 손은 내 어깨에 올라와있었다. 여직원들 허벅지를 더듬던 다른 손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역시, 김치올이 최고구만! 이름처럼 앞으로 치고 나가! 그는 포효와 함께 기절했다. 나도 만취상태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 호랑이새끼를 얼른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태 호랑이는 사라졌다. 내 나름대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했는데, 희진도 함께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카페 문을 여는데 뭐가 톡, 하고 떨어진다.


아저씨는 절대 보호해 주지 않을 거예요.
                                         - 미래 경찰관


이게 무슨 소리지. 경찰서에서 뿌리는 광고 전단지인가. 잘못 온 편지인가 싶어 앞뒤로 살피는데 '블록 사장님께'라고 수신인 표기가 되어있다. 나에게 온 편지는 맞는데, 이런 편지는 누가 보낸 걸까.  아저씨라고 쓰여있는 것 보니 어린 학생이 보낸 것 같은데 혹시 그 피아노 학원 전화사건과 관련이 있는 걸까?  일단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괜히 등골이 싸늘해서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놓고 오픈 준비를 했다.


오픈 팻말을 걸자마자 앨리스가 왔다. 오늘도 콜드브루 한잔을 주문하는 그녀. 희진과 조금 분위기는 다르지만 많이 닮은 여자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호리호리한 몸매를 보아하니 결혼은 안 한 것 같기도 한데 말투나 행동을 보면 노련한 게 기혼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했다면 애가 있을까? 아무리 봐도 출산을 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외모와 체형이다. 커피를 준비하면서 앨리스의 옆태를 흘끗 보는데 갑자기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를 뒤로 확 밀더니 나에게 다가온다.


“내일 여기 제가 전체 대관해도 될까요? 테이블 좀 붙이면 8자리 정도는 될 것 같은데.”

”아 네. 그러셔도 됩니다. 혹시 몇 시간 정도... “

“한두 시간이면 될 것 같아요."

"네 가능합니다. 혹시 어떤 건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고개를 잠시 옆으로 기울이던 그녀는 다시 몸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엄마들이랑 커피 한잔 하려고요. 여기 커피 맛있잖아요?”


아마도 앨리스는 눈치챘을 거다. 한 남성이 자신이 뱉은 한 단어를 듣고 상당이 좌절했다는 걸. ‘엄마’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실망을  부르는 단어였다니. 카운터 밑에 둔 얼음을 하나 씹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나의 요동치는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리스는 30분 정도 있다가 태연하게 떠났다. 한참 동안 그녀가 있던 자리를 치우지 못했다.


가슴이 텅 빈 듯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설계도면도 하나 그리지 못했다. 손님이 더 이상 올 기미가 없어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기로 했다.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아침에 받은 편지가 괜히 찝찝해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흉흉한 세상이니 CCTV위치도 확인 할 겸.


녹담동 언덕은 가팔랐다. 평소 차로만 다녀서 몰랐는데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렇게 동네 구석구석을 둘러본 게 처음이었다. 한 고개 넘고 나니 경찰서가 하나 보였다.  아침에 받은 편지를 꺼내니 경찰관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경찰서 주변을 서성거리니 수상해 보였는지 건물 안에서 경찰관이 나온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아닙니다. 잠시 지도를 좀 보고 있습니다.”

경찰서 옆에 세워진 게시판을 보며 동네 지도를 살피는 척했다.

“제가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돼서 그런데, 여기 초등학교가 큰 게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요?”

“네. 녹담초라고 있습니다. 야구부가 유명하죠.”

친절한 경찰관은 녹담초등학교 가는 길을 알려주며 지금쯤 가면 야구부 아이들이 연습을 하고 있을 테니 구경을 해보라고 했다. 박은택, 이정범, 심순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 야구인들이 이 학교 출신이라며.


경찰관이 알려준 길로 가다 보니 멀리서 빵-빵-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어릴 때 꿈이 야구선수였다. 어린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많이 하지만, 거친 아이들과 몸을 부딪치며 하는 운동은 질색이었다. 대신 야구를 했다. 모두가 타석에 들어설 수 있고 남이랑 몸을 부대낄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사람들 속에 있는 걸 싫어했던 것 같다.


녹담초 정문을 들어가니 멀리서 야구부 선수들이 보인다. 그물망을 세워두고 배팅볼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천천히 그들을 바라보는데 발에 뭔가 툭 하고 치인다. 누군가 덩그러니 놓고 간 야구헬멧이었다. 뭔가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머리 사이즈도 알맞은 것 같아서 내 머리에 한번 써봤다.


그러고 나서 바로 정신을 잃었다.





벌써 4화네요. ㅎㅎ 배경 설명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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