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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경계없는 자유 (오리너구리, 타롱가주)

by 시드니


계획없이 아무렇게 돌아다니며

오리너구리의 경계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다







다리가 너무 아파 하루 글을 쓰지 못하고 다음 날 쓰고 있다.
이 글은 8월 2일 토요일의 다음 날 기록이다.


이날 원래는 록스마켓에 한 번 더 가려 했지만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난 데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포기했다. 어딜 간들 어떠하리. 어차피 패키지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이다. 누구와의 약속도 없고, 심지어 나와의 약속도 없다. 그래도 시드니 도심에서의 마지막 여행 날이라 ‘인생 미트파이’와 예약해둔 레스토랑 Bar Totti’s만을 목표로 하고 나머지는 발길 닿는 대로 맡기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서리힐즈에 있는 빵집 Bourke Street Bakery. 지난번 방문했을 때 인생 미트파이를 맛보고 한 번 더 먹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슷한 맛을 한국에서 찾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 여기서 먹고 떠나야 한다. 토요일 정오쯤 빵집에 도착하니 이미 현지인들로 줄이 길었다. 줄이 길긴 했지만 한국인들로 북적였던 뉴타운 컴포즈보다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 느꼈다. 이곳은 현지인 맛집이니.


5분 정도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지난번처럼 미트파이, 바나나 브레드, 진저 레몬 타르트를 주문했다. 빵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는데, 미트파이가 지난번과 주문한 것과 다르다. 지난번에 찍어둔 사진이 있어 점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지난번 것은 클래식 파이고 이번 것은 치킨 파이라고 한다. ‘미트파이’면 같은 소고기 파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종류가 여러 개였던 것. 점원 말로는 방금 주문한 치킨 파이가 베스트 메뉴라고 했지만 내 입맛에는 클래식 파이가 더 맞았다. 이번 시드니 여행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바로 커피와 이 파이 때문이 아닐지.


이게 치킨파이
깨 없는게 미트파이


돌아보면 미트파이라는 걸 시드니 와서 처음 먹어봤다. 원래 영국 음식이라곤 하는데 영국 여행을 갔을 때는 베이크드빈즈 토스트와 피시앤칩스, 서브웨이만 먹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종종 유명 베이커리에 가면 미트파이를 보곤 하는데 크기는 훨씬 작고 내용물이 적었다. 칼로 조금만 잘라내도 속이 쏟아지는 호주식 미트파이랑은 바이브부터 달랐다. 여행이 며칠 더 남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이 파이가 그리워질지 가늠조차 안 된다.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서큘러키로 이동하기로 한다. 우버를 주로 불러 다니다가 처음으로 트램을 타봤다. 시드니 교통카드는 상상 이상으로 편리했다. NFC 기능만 있으면 별도 티켓 구매가 필요 없다. 아이들은 별도 교통카드(Opal)가 필요하지만 성인은 정류장에 있는 버튼에 Tap on/off 하면 된다. 한편으로 이렇게 해두면 비양심적인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정말 우리 말고는 Tap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는 분 계시면 이것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서큘러키에서 내리려다가 한 정거장 앞인 Bridge Street에서 내렸다. 갑자기 Diggy Doo’s 커피가 먹고 싶었으니까. 일주일 남짓되는 기간 동안 세 번 방문했다. 시그니처인 모카는 여전히 맛있었지만, 미트파이 직후라 달달함이 과해 첫 느낌의 맛에 비해 반감된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시드니 No.1 카페임을 말해주고 싶다.


커피 후에는 서큘러키 페리 탑승장으로 걸어갔다. 행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단 우리의 발길이 닿는 승강장으로 가니 루나파크행 페리가 있다고 한다. 대기 시간을 보니 24분. 옆 승강장을 보니 타롱가주 가는 배가 곧 출발한다는 시그널이 보인다. “그냥 여기 갈까?” 한마디에 3명이 우르르 타롱가주 페리에 올라탔다. 비가 오고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이런 충동적인 발길이 도파민을 터뜨렸다. 얼마 전 비가 와서 타롱가주 여행을 포기했었는데 남편이랑 같이 있으니 이런 객기도 부리게 된다. 비가 와도 앞길이 뿌옇더라도 가족이랑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페리를 타고 가는데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 보통 오페라하우스의 왼쪽 부분만 보게 되는데 배를 타고 가다 보니 오페라하우스의 오른 얼굴도 보였다. 거의 대칭에 가까운 건축물이지만 다각도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배를 타고 가다가 항구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인공섬 하나가 눈에 띄었는데, 바로 Fort Denison이라는 유적지였다. 시드니 정착 초반에 ‘물 위의 감옥’으로 불리는 죄수 격리 장소였다가 군사 요새였다가 지금은 레스토랑 오픈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저기서 밥을 먹으면 상당히 무서울 것 같은데 호주인들의 유적 보존 정신에 놀랐다. 과거를 거의 그대로 보존해 남기는 유럽인들의 습성인가 싶기도 하다.


첫 페리



타롱가주에 도착하니 오후 2시 반이다. 4시 50분에 문을 닫는 동물원에 2시 반에 오는 관광객은 거의 없을 거다. 그래서 표를 끊는 줄에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비 오는 날의 늦은 오후, 동물원은 텅 비다시피 했다. 뭐, 잘됐다. 날씨 좋은 날 오전이었으면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을 텐데 거의 전세 낸 느낌으로 인기 동물들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타롱가주에서 가장 기대되는 건 단연 오리너구리다.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오리너구리. 오리과도 아니고 너구리과도 아니고 ‘오리너구리’과라 고유해서 경쟁이 필요 없다는 그 녀석을 만났다. 오리너구리는 야행성이라 어두운 수조 안에 홀로 있었는데, 옆에 서 있던 동물원 직원이 “She is very fast.”라고 말하는 걸 듣고 그 녀석이 암컷이라는 걸 알았다. 얼굴은 오리고 몸은 너구리인 녀석을 한참 바라보다 보니 동물원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다른 동물들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미 페더데일 동물원을 다녀온 뒤라 미련 없이 다시 페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저녁은 예약해둔 Bar Totti’s에서 먹었다. 오후 5시 정도였는데 식당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대기 줄에 서 있는데 몸 좋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다닌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쿼터백 같은 남자들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호주 국가대표팀이 축구 경기를 하고 이겼다고 한다. 분위기가 달아오른 느낌이라 조금 저항감(?)과 불안함이 들었지만 이런 아시안의 마음을 읽었는지 조금 조용한 자리로 안내해주어 편안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음식은 유명 식당답게 맛있었다. 다시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행의 기분을 내긴 충분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날씨가 확 추워졌다. 낮에 트램을 탄 기억이 좋아 트램을 타고 제트랜드 근처인 켄싱턴까지 이동했지만, 켄싱턴에서 숙소인 제트랜드로 가는 버스가 영원히 오지 않을 기세라 우버를 잡아 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뻗었다.




시드니에 와서는 하루 마무리에 꼭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글을 썼다. 하루를 아무렇게나 보내도 마지막에 글을 쓰면 하루가 매듭지어지는 기분이 들어 포근하게 잠들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아무렇게나 여행을 다니고 글도 못 썼다.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글을 못 쓴 그 사실마저 또 하나의 글감이 된다. 규칙에서 벗어나도, 루틴이 깨져도 상관없는 거다.


생각해 보면 오리너구리도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새도 아니고 포유류도 아닌 채로 물속과 땅을 자유롭게 오가며, 부리와 발, 꼬리가 뒤섞인 채 살아간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않지만 그게 곧 이 생물의 방식이다. 여행 마지막 날의 나도 그랬다. 계획과 즉흥, 루틴과 무질서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진정한 오리너구리 상태였다.


시드니 여행기를 처음부터 본 분들이라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회사원 할지 작가 할지 고뇌하던 분은 어디 갔나요?”
맞다. 여행 초반에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니 어제의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다. 내가 어제 무슨 생각을 했었지? 분명 뭣 때문에 매우 빡쳐 있었는데…



시드니 여행 와서 어제의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증상의 정점은 울루루에서였다.







ps. 대상포진에 걸려서 꾸준하던 업데이트가 좀 늦었습니다! "어제의 내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던 울루루 시리즈 4편을 연재하고 마무리 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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