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결핍과 불행을 타인으로 해소할 수 없다.
내 행복은 나 스스로 찾아야한다.
행복이 어렵다면 기쁨부터 찾자.
마카다미아 밀크로 기쁜 나처럼.
아침에 눈을 떴더니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요청내용이 하찮아서 금방 답해주었지만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조금만 수소문해보면 충분히 알수 있는 정보인데 그거 하나 옆사람에 물어보기 귀찮아서 휴가 중인 사람에게 연락을 하다니. 아무리 격의 없이 지내는 동료지만 배려심이 많이 부족한 듯하다. 원래 평소에도 이 동료에 대한 인식이 딱 ‘배려심 없다’ 였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나한테 연락이 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회사에서의 나는 항상 해맑은 편이라 사람들이 많이 다가오는데 나의 부재가 어떤 이에게는 햇살 하나가 사라진 기분일 수도 있다. 안타까운 건 나는 태생이 기안84급 자유인이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속박되지 않는다. 나에게 유독 집착하는 듯한 사람이 있으면 더욱 멀어진다. 배려심이 부족한 그 동료는 영원히 이런 사실을 모르겠지만….
오늘도 시드니는 비가 온다. 여독이 덜 풀린 남편은 침대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다. 목도 펴지 못한 채 10시간 비행기를 탔으니 무리가 당연하다. 그래도 남편이 와서 좋은 점이 있다. 아이를 호텔방에 두고 혼자 산책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 우산 하나를 챙겨들고 커피를 사러 나섰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도 전에 쏴- 빗소리가 들린다.
나는 빗소리가 좋다. 어릴 적 자주 갔던 할아버지 댁은 전통가옥이었는데 툇마루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격지심, 질투, 심통으로 가득했는데 빗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응어리가 풀리곤 했다. 아마도 응어리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나는 이미 10대 이전에 다 써버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마음에 응어리 같은 건 별로 없다. 혹여 남아있다고 해도 간헐적으로 쏟아내리는 비에 까만 마음을 흘려보낸다.
시드니가 한국과 비교해서 두드러지는 장점은 자동차들이 보행자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외곽 지역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많은데 신호가 없어도 차들이 알아서 멈춰준다. 차와 나와의 거리가 애매해서 내가 주춤하면 운전자가 먼저 손짓하며 가라고 배려한다. 이런 장면에서 선진국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트랜드에 온지 고작 이틀째지만 벌써 단골카페가 생겼다. Joynton Park 안에 있는 Pebble & Bark 이라는 카페다. 어제 오후에도 다녀왔는데 플랫화이트가 너무 맛있어서 다시 찾았다. 시드니 8일 동안 ‘3대 카페’라 불리는 검션, 싱글오, 캄포스까지 다 가봤지만 정작 시내와 동떨어진 제트랜드 호텔 앞 공원 카페에서 인생 커피집을 만났다.
이곳의 매력은 아이스커피 종류가 다양하고 도심의 카페들과 달리 2가지 사이즈를 제공해준다. 심지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다!! 시드니에서 아이스 커피가 드시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곳을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메뉴는 한국 카페와 거의 비슷한 구성이면서도 약간 다른데 tumeric & ginger가 들어간 메뉴가 있다. 중국계 이민자가 많은 도시답게 이런 향신료를 활용한 메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카페 주인도 중국이나 동남아계로 보인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할머니가 있고 점원만 달랐다. 돌아보면 시드니에서 만난 아시아계 호주인들은 한국에서 느낀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친절함과 닮아 있었다. 해맑고 웃고 설명이 길고 자세하다.
남편의 커피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 커피를 집어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노트북을 세팅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동남아 할머니가 만들어준 플랫화이트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보통 플랫화이트는 식으면 맛이 떨어지는데 이곳 커피는 식어도 맛있다. 커피를 만들고 나서 머들러도 잘 저었는지 첫입과 끝입의 농도가 일정하다. 앞서 메뉴를 고를 때 레귤러 사이즈와 라지 사이즈 중에 고민했는데 라지를 주문하길 잘했다.
한국에서는 왜 large 사이즈 플랫화이트를 팔지 않을까. 내가 임의로 커스터마이징할 수는 있지만, 바리스타가 연구한 레시피와 내가 조합한 레시피가 같을 수는 없다. 한국에 돌아가면 large 플랫화이트를 파는 카페를 꼭 찾아봐야겠다.
식어도 맛있는 커피는 조급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조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
커피를 마시며 마을을 내려다본다. 행복하다. 살짝 한기가 도는 공간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 것. 지금이 딱 그 행복이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평생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벌써 8월이라니. 뭘 했다고 시간이 이렇게 흘렀을까. 피곤한 남편을 할수 없이(?) 깨웠다. 오후2시만 지나도 시드니는 일정이 애매해지니 정오에는 어딘가로 나가야한다. 오늘의 행선지는 뉴타운. 뉴타운은 시드니의 ‘이태원’ 같은 곳이었다. 시드니 대학 주변이라 그런지 자유분방하고 곳곳의 그래피티가 인상적이었다.
점심은 빠니보틀이 추천했다는 마셀렐리아(Macelleria)에 들렀다. 빠니보틀 효과인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한국 단체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점심 피크타임을 지나서 자리는 널널했다. 남편과 나는 대표메뉴 Angus scotch fillet과 안심부위라는 Angus eye fillet을 주문했다. 곁들임으로 고구마튀김, 샐러드, 맥주도 곁들였다.
고기는 그냥저냥 괜찮았지만 한국에서 이미 맛있는 고기를 먹어봐서인지 큰 감탄은 없었다. 맥주는 – 말을 아껴야할 수준의 품질이었다. 일본 생맥주에 길들여진 내가 기준이 높은 걸로 봐야할 것 같다. 고기를 먹으면서 남편이랑 대도식당 등심구이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도식당이 최고야, 우리 거기 언제가지? 호주 고기를 씹으며 한국 고기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샐러드를 하나 더 시켰는데 예상보다 느끼해 몇 입 먹지 않았다. 그러자 남편이 “왜 시켜놓고 안 먹냐”고 채근한다. 내가 뚱한 표정으로 보자 남편이 한마디 더 한다.
“내가 온 게 실감나지?”
네…매우 실감납니다. 남편은 피시앤칩스 같은 사람이다. 겉은 바삭, 속은 퍽퍽. 그런데도 먹다 보면 중독돼 계속 찾게 된다. 이미 10년을 넘게 붙어 살았으니 이제는 그나 나고 내가 그다. 내가 영국이라면 그는 피시앤칩스다. 나를 대표하는 음식이자, 나의 남편. 휴.
창밖을 보던 남편은 Route66 간판을 보고 이것저것 설명해준다. 대공황 시절 서부로 떠나는 길이었다느니,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 국도였다느니. 남편은 잡학다식해서 같이 있으면 심심하진 않지만 특유의 시니컬함 때문에 묘하게 기분을 잡치게 한다. 하지만 나는 붕어 수준의 기억력이므로 금방 잊어버리고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
식사 후 뉴타운을 걸었다. 작은 카페, 독립 서점, 소품샵이 곳곳에 있었다. 특히 베러 리드 댄 데드(Better Read Than Dead)라는 서점이 마음에 들었다. “죽는 것보다 읽는 게 낫다”는 언어유희도 재밌었고, 섹션별로 구성이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매대에서 장류진 작가의 달까지 가자(To the moon) 영문판을 보자 괜히 반가웠다. 호주까지 진출한 한국 작가들이 대단해보이고, 나도 언젠가-라는 꿈을 꿔본다.
조금 걷다가 피로해져 뉴타운 유명명소! 캄포스 커피로 향했다. 가게에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한국어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까망머리 아시아인들이 가득하다. 남편과 나와 공통된 점 하나는 절대 줄을 서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 로라마을에서 캄포스 커피를 마셨었다. 아포카토가 일품이래서 먹어보고싶긴 했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신 구글 평점 4.5인 Beantown이는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시키려고 메뉴판을 보는데 우유 타입이 끝이 없다. 저지방 밀크, 소이밀크, 오트밀크, 아몬드 밀크, 코코넛밀크, 마카다미아밀크까지 .
나는 관성적으로 오트밀크를 고르고 남편은 새로운 걸 도전해보겠다며 코코넛밀크를 선택했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도전적이다. 낯선 선택에서 마음에 드는 맛을 발견하면 기쁨은 배가된다. 첫 번째는 맛있어서, 두 번째는 맛있는 걸 ‘알게 되어서’. 뭔가를 알게 되면 선택지가 많아진다. 그래서 마음이 평온하고 인생이 밋밋하지 않게 느껴진다. 겨우 코코넛밀크 하나 알았지만 괜히 흥분된 마음에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즐거운 뉴타운 여행의 마지막은 Coles(마트)였다. 바로 라면 코너로 달려가 신라면과 진라면을 사왔다. 점심에 먹은 스테이크가 느끼했다. 라면을 집으며 우리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8일간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라면을 세 번, 순두부찌개까지 합하면 네 번이나 한국 음식을 먹었다. 이틀에 한 번 꼴이다. 출장길 며칠은 잘 참았는데 오히려 긴 여행에서는 더 집착하게 된다.
인생도 비슷하다. 금방 다가올 일에는 덤덤하지만, 멀고 요원한 것에는 매달리고 집착한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라면’일지라도. 라면이 어떤 집착처럼 느껴지지만 집착을 해서 오는 행복도 있다. 아침에 연락 온 동료에게 나는 라면 같은 존재일까 – 그녀에게 더 이상 행복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본인만의 라면을 스스로 찾아내길!
- 끝 -
잠깐! 시드니의 시드니 여행기, 재밌게 읽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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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교육 (10.11~11.15,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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