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2주간의 호주에 대한 소회를 적고 싶었다. 하지만 9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단 한글자도 쓰지 못했다. 비행기에 타기 전 조금 뜨근한 정도였던 아이의 열이 비행기를 타자마자 38도를 넘는다. 승무원에게 아이가 열이 나는 상황을 알렸더니 여행 내내 살뜰하게 살펴주셨다. 비행기에 있던 응급용 한국 해열제를 먹으니 정상온도로 돌아왔는데 해열제를 먹고 3시간 지난 뒤 갑작스럽게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이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계속 얼음 마사지를 해줬다. 평소 낮잠을 잘 자지 않는 아이인데 고열에 시달리다보니 내리 잠만 잔다. 얼음마사지 덕분인지 열이 진정되어서 38.0~38.3도를 왔다갔다하는 걸 확인하고 잠시 멍을 때리는데 익숙한 글자가 눈 앞에 보였다. 바로 쿠팡. 정신없는 와중에 쿠팡은 어디든 있구나 싶어 정신없는 와중에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저녁 6시 50분쯤 인천에 착륙. 인터넷에 연결되자마자 인천에 야간진료하는 소아과를 찾았다. 청라에 꽤 유명한 소아과가 있어 전화해 접수마감 시간을 물어보니 오는 건 상관없는데 도착해서 대기가 있으면 진료를 못받는 다고 한다. 접수마감 시간을 물었을 뿐인데 대기가 있으면 못온다니. 지금은 널럴하지만-이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준다. 정신이 없으니 누굴 비방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바로 다른 병원을 찾았다.
‘인천 야간진료 소아과’를 검색하니 바로 공항 안에 의료센터가 나온다. 입국심사를 하며 연락을 하는데 현재시간 7시24분. 의료센터에 전화해보니 7시30분까지 접수마감이지만 7시35분까지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입국장 바로 밑에 있다. 못찾을까봐 걱정되는 마음에 미친듯이 달려나가니 다행히 7시31분, 병원 접수를 했다. 정신나간 표정으로 들어가서 그런지접수대에 있는 선생님이 걱정하는 얼굴로 바라보며 친절하게 응대해주신다. 청라로 안가길 잘했다. 휴.
아이는 다행히 처방받은 덱시부펜을 먹고 금방 열이 내렸다. 울루루에서 인천까지. 하루가 10년 같았다. 여행 초에 다짐했던 나를 찾는 여행이고 나발이고 간에, 회사고 작가고 뭐고 간에 건강없이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일단 건강할 것. 무조건 건강을 외치며 이 여행기를 마무리 하려고 한다.
ps. 인천공항 의료센터 간호사 선생님도 친절하셨지만 의사선생님이 정말 친절했다. 평생 만난 의사 선생님 중 1등 친절. 정신이 있었으면 이름이라도 봤을텐데 아이가 징징대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보고 나와버렸다. 2025년 8월6일 밤7시30-8시 사이에 인천공항 의료센터 근무하셨던 엄마 의사선생님 진짜 스치는 것마다 돈이 되고 가족은 평온하고 평생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된 여행의 이유다. 여행은 일상과 나를 단절시켜주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해외영업이 주 업이라 출장을 숱하게 가지만 그래도 꼭 시간을 내서 나만의 여행을 가곤 한다. 공항을 그렇게 가는데도 또 여행을 가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꾸준히 떠난다.
누군가 나에게 여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내 삶의 질서를 스스로 정리할 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호주 시드니의 숱한 지역을 여행할 때도, 울루루에서도 다양한 삶의 양식을 만난다. 한국에서 정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정답이 아니고 그게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걸 여행을 통해 알게 된다. 게다가 여행 중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얻은 평판은 한국에서나 통할 뿐 여행지에서 나는 그저 자연인이다. 어디서도 속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을 대하는 여행지의 태도에서 그 사회의 품격을 느낀다.
시드니 다녀온 후 친한 동료들과 후기를 나누는데 한 사람이 ‘나 여행 싫어해.’라고 한다. 그럴 수 있다. 누구든 여행을 좋아할 필요도 없고 여행을 갈 수 없는 개인의 다양한 이유가 있으니 함부로 상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멀지 않는 여행지라도 간헐적으로 다니는 걸 추천하고 싶다.
나라가 작고 근현대사에 부침이 많아서 그런지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한 가지의 포뮬라를 강요한다. 서울, 자가, 대기업, 고학력 등. 한 드라마가 회자가 많이 되는게 농담같지 않는 일률화된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면 금방 도태됨을 느낀다. 모두가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쉬면 금방 레이스에서 벗어나곤 한다.
그럴 때 여행을 가보면 한국에서 강조되던 삶이 몇천개의 삶 중에 하나임을 알게 된다. 어차피 각자 주력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데 굳이 하나의 가치를 추종할 필요가 있는가. 결국 여행을 통해 나는 나의 질서를 구축하는 사람이 된다.
나를 백지로 만들고 뭔가를 채우고 또 나를 백지로 만들고 뭔가를 채우면 결국 정제된 나를 만나게 된다. 아무리 태풍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비털 수 있는 힘, 그게 여행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내 여행은 계속 될거다.
시드니의 시드니 여행기,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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