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있는 노력

회사에는 글 잘쓰는 사람이 별로 없지

by 시드니


“안녕하세요. 방송국 시험 준비하다가 떨어져서 이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나 다음으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동기의 표정이 잿빛이 됐다. 1분 전 사회자는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 말고 자신의 개성에 대해 말해 달라 주문했다. 내 개성은 하나였다. 3년 동안 방송국 시험만 봤다는 것. 다행히 노련한 사회자는 얼어버린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다음타자에게 소개를 넘겼다. 하필 내 옆에 있던 불쌍한 어린양은 자신도 뭔가를 고백해야 하는 압박감을 느꼈는지 “저는 25살인데 벌써 애가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다음 어린양은 “대학을 중국에서 나와 항상 외로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라며 갑자기 외쳤다. 노련한 사회자도 수습할 방법을 모르고 있을 때, 마지막 어린양이 아무도 못 알아듣는 민요를 부르면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나중에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 회식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 신입사원 정말 이상하다’며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의 우려 속에 해외사업본부 신입사원 4명의 사무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출근 날 본부장은 신입사원 전원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본부장 “그래, 너는 특기가 뭐냐?”

어린양 A “저는 중국어를 잘합니다.”

본부장 “여기 외국어 못하는 사람이 있나?”

어린양 A “...”


동굴 목소리를 가진 본부장은 매섭게 우리들을 노려봤다. 어린양 A가 머뭇거리는 사이 맹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본부장은 같은 질문을 했다. 생각할 틈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나 “저는 글쓰기를 잘합니다.”

본부장 “글쓰기? 어떤 글쓰기?”

나 “방송국 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본부장 “아! 기자 준비를 했구나!”

나 “아니요. PD...입니다.”

본부장 “그래그래! 기자! 기자!”


맹수의 머릿속에 나는 기자를 준비한 신입사원으로 완벽히 입력되었다. 다음날 본부장은 ‘저기 기자 준비한 애!’를 부르며 첫 업무를 하사했다. 연초에 주요 거래업체에 감사편지를 써야 하는데 올해는 멋들어지게 보내고 싶다는 거였다. 용기를 내어 본부장에게 간략히 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본부장은 포스트잇을 꺼내더니 만년필로 휘갈겼다.

‘올해도 잘 부탁함’.


노란 종이를 들고 자리에 돌아와 빈 종이를 펼쳤다. ‘대북문제’, ‘부동산투기’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언론고시용 글보다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께 쓰는 편지가 훨씬 잘 써졌다. ‘거세 개탁한 세상 속에서도 맑게 깨어계시는 00 사장님께’로 시작한 글은 매년 방송국 필기시험에 나오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적절히 풀어쓰니 금방 A4 반 장을 채웠다.


사수에게 한번 보여주고 난 뒤 본부장 메일로 그 편지를 보냈다. 몇분 후 본부장실에서 '저기! 기자!'하며 벽을 뚫는 외침이 들렸다. 주변사람들이 다 날 쳐다봤다. 평소 저 목소리는 누군가에게 불호령을 내릴 때 내는 소리임에 분명했다. 방문에 들어서자 본부장은 인상을 팍 쓴 채 ‘거세개탁이 뭐지?’라고 물었다. ‘올해의 사자성어입니다. 매년 교수신문에서 선정합니다.’라고 침착하게 답했다. 본부장은 ‘허허’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회사에는 글 잘 쓰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말이지.'


자리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있었다. 성취감이 들었다. 돈벌이 때문에 억지로 들어온 회사에서 글로 칭찬을 받았다. 사실 글쓰기로 칭찬받은 건 거의 처음이었다. 스터디에서는 주로 첨삭을 하기 때문에 서로 고칠 부분만 알려준다. 칭찬은 ‘잘 읽었어요.’ 정도.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더군다나 적응이 어려울 것 같았던 회사에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얼마 후 신입사원들은 부서로 배치됐고 나는 보고서를 쓰는 기획부서로 갔다. 보고서는 대부분 정형화되어있었고 쓰는 단어는 한정적이었다. 가끔 본부장의 인사말을 쓰거나 편지를 썼다. 칭찬을 받고 나니 더 잘하고 싶었다. 인사말에 쓸 글감을 찾기 위해 회사 도서관을 찾았다. 자본주의의 선봉에 서있는 기업에서 문학적 글귀를 찾고 있다니.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재밌었다. 왠지 이 회사에 눌러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시드니는 표정이 참 밝아.”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동공이 풀린 눈과 흐트러진 머리로 주변인을 불편하게 했던 그녀는 없었다. 3년 넘게 고시공부를 하면서 억눌려있던 에너지가 폭발하고 있었다. 세상은 정말 넓었다. ‘방송’만이, PD가 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의 극히 일부였다.


즐겁게 회사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회사가 목표였다면? 이 회사를 들어오기 위해 이렇게 살아온 거였다면? 사실 방송국 시험에서 공부한 시사상식과 외국어 공부는 취업을 위한 준비가 맞았다. 여기서 그동안 갈고닦은 글쓰기가 더해지니 느낌 있는 사람, 나만의 스타일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는 그 느낌이 필요했다.

회사 입사를 선택하면서 그동안의 내 공부는 다 거품이 된 줄 알았다. 꿈을 더 이상 꽃 피울 수 없는 세상은 날 영원히 괴롭힐 줄 알았다. 그 생각은 틀렸다. 그동안의 시간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한 ‘느낌 있는 노력’이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크고 날 기다리고 있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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