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롱 Nov 27. 2023

오늘이 처음인가 봐

위로의 말

 입사 3주 차 월요일. 새벽이 어슴푸레 다가오기 전인 4시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렸다. '조금만'을 속으로 외치며 이불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5분 간격 알람이 4번은 울리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얼른 씻고 엄마가 전 날 끓여 놓으신 국을 데워 밥과 먹은 후 5시 첫 차를 타러 나갔다. 차가 없는 새벽의 도로를 달린 빨간 버스는 출발한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나를 목적지에 떨구었다.


 처음 입사한 병동은 성형외과 병동. 출근한 날이 열흘이나 되었을까. 금요일 근무 후 갑자기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른 병동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입사 3주 차 월요일, 종양혈액내과 병동으로 출근했다.  새로운 병동에 들어가니 데이 근무자 중 출근 한 사람이 나 밖에 없다. 이 병동은 처음인데 나를 인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나 지금이나 신규들은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데, 근무시작 시간보다 매우 일찍 출근한다)

 나이트 근무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병동의 처치실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한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다급하게 부르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환자들 바이탈(vital sign 바이탈 사인. 활력징후. 혈압, 맥박수, 호흡수, 체온을 말한다) 체크 좀 해 와."  명찰 한번 힐끗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오늘 처음 병동에 온 신규한테 대뜸 자기 일을 떠넘긴다. 너무 당당 한 모습에 데이가 출근하면 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신규시절에 윗년차에게 겪은 그대로 하는 것이라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혈압계와 청진기, 체온계를 챙겨 환자들 바이탈 사인 체크를 시작했다. 새벽 5시 40분. 입사 전에는 이 시간에 깨어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잠에 매우 충실하고 깨우면 화를 내는 사람이기에 자고 있는 환자들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한 마음이 들었다.  어두운 병실에서 자는 환자들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눈도 못 뜨는 환자들의 팔을 붙잡고 바이탈 체크를 했다. 마지막 방은 불이 켜져 있었다.  


"김영롱 님, 혈압 체크하겠습니다."

"아이고, 오늘 처음인가 봐. 여기서 처음 보는 얼굴이야."

"네. 오늘 처음 왔어요."

"힘들지? 앞으로 많이 힘들 거야.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 해 질 거예요."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고 처음 보는 환자 앞에서 울어버렸다. 아저씨는 당황하시지도 않고 말을 계속하셨다.


"여기는 환자들이 병원 생활을 자주 해서 새로 온 애기 선생님들한테 막 함부로 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도 있어. 그럴 때는 속으로 너무 담아 두지 말고 그냥 넘겨. 공부하고 일하다 보면 익숙 해 지고 그 사람들이 입도 뻥끗 못하게 잘하는 날이 올 거야. 다음에 나 입원했을 때 또 만나요."


 처음 출근한 병동에서 환자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사회 초년생에게 건넨 아저씨의 그 말 한마디는 위로의 말이었고 눈물이 났다.

  

출처: pixabay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관계, 선배들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약자로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내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기계처럼 반복됐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하루를 곱씹으며 자괴감에 무너지는 내가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일기장이 시커멓게 채워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어느 날 나에게 위로를 건네어주었던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그분이 암을 진단받고 항암치료를 지속하는 시간 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죽음이 가까움을 느끼셨을까,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계셨을까. 그런데 오히려 나에게 위로를 건네어주었던 아저씨였다. 그 위로의 말은 내가 좀 더 나은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일은 물론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더욱.


 인간관계에서 경청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바쁜 근무 시간을 보내면서 환자와 말 한마디 나누기가 버거운 날도 허다하지만 그만두는 게 될 그날까지 좀 더 힘 내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선생님, 죄송한데 아세65가 뭔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