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남자 대장암 환자였다. 우리 병원에 처음 내원했을 때 이미 암이 전신에 다 퍼진 상태였고 대장의 암 덩어리는 크기가 꽤 커서 장을 막기 직전이었다. 스텐트 시술은 불가한 위치였고 기저질환과 병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완화 목적의 수술조차 할 수 없었다.
항암치료에 반응을 한다면 장이 막히는 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었지만 반응을 안 한다면 장 천공이 발생하면서 갑자기 사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병이 이렇게 위중한 것에 비해 그는 아직 스스로 거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보호자 관계를 물어보니 직계 가족도 친척도 없다고 했다. 병의 진행으로 인한 장 천공 발생 가능성을 포함하여 어려운 상태임을 그에게 설명하였다. 그는 항암치료를 안 해도 어차피 곧 죽을 것이라면 치료를 받아보겠다고 결정했다. 항암치료 외에 연명치료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였음에도 암으로 인한 복통은 서서히 악화되었고 2차 항암치료가 끝나자 병색이 더 짙어졌다. 항암치료가 듣지 않는 듯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항암치료를 계속 이어나가기 어려워 보였다. 3차 항암치료는 보류하고 통증 조절을 하며 경과를 보기로 하였다.
2주일이 지났다. 그는 더 쇠약해졌고 복통도 더 심해졌다. 먹지 못했고 움직임이 느려졌다. 아침 라운딩을 도는데 나보고 옆에 앉아보라고 했다. 병실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행운의 2달러라며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거 귀한 거니까 저 주시지 말고 OOO님께서 잘 간직하고 계세요."
라며 돌려드렸다. 그는 서랍을 뒤적뒤적하더니 다시 무언가를 내밀었다. 현직 대통령 얼굴이 인쇄되어 있는 기념우표였다. 아끼는 물건 하나를 꼭 나누어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면 이거 한 장만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마치 마지막으로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라운딩이 끝난 후 책상 서랍장 제일 아랫부분에 우표를 넣어두었다. 빳빳한 상태로 고이 보관하고 싶었다.
다음날 그는 고열이 나면서 의식이 떨어졌고 이틀 뒤 사망했다. 처음 진단 당시 예상했듯이 대장에 있던 암 덩어리가 더 커지면서 장을 완전히 막아버려 빠른 시간 내에 상태가 악화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무연고 환자로 정리가 되었다. 끝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분명히 나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저 우표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유언을 들어줄 사람도 귀한 물건을 물려줄 사람도 없어서 나에게라도 그의 한 조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환자가 사망하고 며칠 뒤 병동으로 그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뒤늦게 먼 친척이나 지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타난 것일까 일말의 기대를 했다.
"OOO님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 인간이 나한테 돈을 빌려 가서는 안 갚았어!"
그 환자와 관련된 처음이자 마지막 연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