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환자의 대다수는 4기 암환자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환자들을 직접 떠나보내거나 또는 떠난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예를 들어, 3년 전 이 맘 때쯤 입원했던 환자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환자는 1/4도 채 되지 않는다.
주로 입원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환자가 입원 명단에서 안 보이기 시작하면 거의 둘 중에 하나이다. 세상을 떠난 경우 또는 컨디션이 괜찮아서 외래에서 통원하며 항암치료를 하는 경우. 그래서 항암치료 때문에 자주 입원하던 환자가 어느샌가 입원을 안 하게 되면 외래에서 통원치료를 하며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해 본다. 나도 느낌으로는 알고 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미 먼 곳으로 떠났다는 것을.
그러다 보니 1년 이상 안 보이던 환자가 입원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겉으로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라고 인사하며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라는 말은 마음속으로 삼킨다.
오후에 병동 컴퓨터 앞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집중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종종 굳어지고는 한다. 그런데 두건을 쓴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 환자가 말을 걸었다.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순간 내 얼굴에 굳어 있던 근육들이 사르르 풀어지는 것을 느껴졌다. 작년 봄에 입원을 한 이후로 안 보였던 환자였다.
환자 얼굴을 보니 그 당시 일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암의 전이 때문에 폐에 물이 가득 차서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왔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한 2주 이상은 입원이 필요한 상태였었다.
배액관을 꽂자 당장 그날부터 호흡곤란이 많이 완화되었다. 다음날, 그녀는 배액관을 뽑고 오늘 당장 퇴원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증상이 잠깐 좋아진 것일 뿐 아직 치료가 더 필요한 상황을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다 갑자기 울면서 손으로 빌기 시작했다.
"제발요 교수님. 제발 퇴원시켜 주세요."
이대로 퇴원을 시켰다가는 오늘 밤에 다시 응급실로 올 것이 명백했다. 그녀에게 퇴원을 꼭 해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지를 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청소년 딸이 한 명 있는 싱글맘이었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고 그 외 가족 및 친척들이랑 절연을 한 상태라 이 세상에는 아이와 본인 둘 뿐이라고 하였다.
"우리 애기가 지금 혼자 학교를 등하교하고 있어요. 밤에 엄마 없는 빈 집에서 무섭대요."
그녀가 왜 그렇게 막무가내였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도 치료가 더 중요했다.
"지금 퇴원해서 다시 나빠지시는 것보다는 며칠 더 혼자 있더라도 엄마가 치료 잘 받고 오래 사는 게 따님한테 훨씬 더 좋을 거예요. 저희한테 2주 정도만 더 시간을 주세요."
우선 급한 불은 어느 정도 끄고 퇴원을 시켜야 했다.
그녀의 집은 병원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딸이 병원에서 등하교를 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대신 금요일에 하교하면서 병원으로 들어와서 금토일 세 밤을 자고 월요일에 등원하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그녀는 대화를 하면서 조금 안정이 되었다. 금요일 오후에는 딸이 병원에 들어왔다. 결국 2주 치료를 채우고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퇴원했었다. 퇴원일에 엄마를 챙기던 중학생 딸은 첫인상만 앳되어 보일 뿐 사실 엄마의 든든한 보호자였다.
가끔 궁금했다. 혹시 힘들다고 외래도 잘 안 오는 것은 아닐지. 딸은 잘 지내고 있을지. 그런데 갑자기 그 환자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다른 층에 입원했는데, 교수님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때 너무 고마웠어요 교수님. 내가 교수님 너무 애먹였던 것 같아. 우리 딸도 교수님 보고 싶다고 이 층까지 따라왔어요. 저기 병동 문 밖에 서 있어요."
당시에 퇴원을 미루는 것이 환자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퇴원을 미루려고 여러 차례 설명하고 설득하면서 마음을 많이 썼던 환자였다. 내 진심이 환자한테 닿았던 것만 같아서, 몸도 편하지 않을 텐데 굳이 이 병동까지 찾아와 준 그녀의 마음이 고마워서, 순간 울컥했다.
그녀는 작은 호두과자 봉지를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병동 밖으로 따라 나가 따님이랑 드시라고 다시 호두과자 봉지를 다시 손에 쥐어주려 했지만 환자는 웃으면서 한사코 거절했다.
호두과자 봉지를 품에 안았다.
호두과자의 온기는 가신 상태였지만 그녀의 마음속 온기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