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회진을 돌 때 환자의 상태에만 모든 관심이 쏠렸었다. 환자의 컨디션이 어떤지, 잘 먹는지, 잘 자는지, 용변을 잘 보는지, 아픈지, 아프다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등등.
그런데 전문의가 되고 시간이 더 흘러 환자를 보는 햇수가 점점 쌓여가면서 이제는 환자들 곁에서 간병하고 있는 보호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종양내과 병동에서 지내는 보호자들을 살펴보면 고령인 경우가 흔하다. 대부분의 암환자가 고령이다보니 보호자인 배우자도 고령이다. 가끔 젊은 암환자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 부모가 보호자인 경우가 많다보니 또 고령이다. (젊은 보호자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경제활동을 하다보니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등 한 두가지 기저질환은 흔하게 있을 연세이지만 훨씬 더 위중한 4기 암환자 앞에서 힘든 티를 내기란 쉽지 않다.
암환자의 고통에 감히 비할수는 없지만 곁에서 간병하는 '암환자 보호자'의 하루도 녹록치는 않다. 환자 침대 옆 좁은 간이 침대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낮에는 빠른 속도로 끼니를 대충 해결하고 밤에는 얕은 잠을 잔다. 하루종일 환자로부터 아프다, 불편하다는 호소를 가장 먼저 듣게된다.
환자 상태가 나빠질 때 옆에서 대신 아파줄수도 없고 그 상황을 해결해줄 수도 없이 묵묵히 곁을 지키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깊이 패이고 까맣게 타들어갈까.
작년 이맘때쯤 기억에 남는 보호자가 있었다. 젊은 보호자라 더 기억에 남았다. 위암이 복막까지 퍼진 60대 여자 환자의 딸이었다. 환자에게는 남은 시간이 길어야 2-3개월 정도였다.
위암이 복막까지 전이가 된 환자들은 마지막 이 시기동안 거의 먹지를 못한다. 복막전이로 인해 장마비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음식이 내려가지를 못하다보니 조금만 먹어도 구토하거나 복통이 심해진다.
보호자들도 특히 더 괴로워하는 시기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환자에게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먹지를 못하고 점점 쇠약해져 가기 때문이다.
엄마를 간병하는 그녀의 눈에는 근심이 담겨 있었고 차분한 말투 뒤에는 흐느낌이 서려있었다. 오전 회진을 갔더니 환자가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간이 침대에 앉아 환자를 바라보고 있어서 뒤통수만 보였다. 환자가 깰까봐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물었다.
"안녕하세요. 어젯밤에 어머님은 좀 어떠셨어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데 눈시울이 붉었다.
복막전이 환자의 숨이 서서히 꺼져가는 그 시간은 의사에게도 쉽지 않다. 환자에게 콧줄(레빈튜브)을 삽입하고 금식시키면서 영양제와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붉은 눈시울을 보고도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진을 끝내고 책상에 앉아서 생각해봤다.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면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도 없을까.
1층 까페에 가서 여름 메뉴 중 하나인 레모네이드 한 잔을 주문했다. 병실에 돌아오니 다행히 환자는 아직 자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을 띄운 노란색 레모네이드를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따님도 힘드시죠...... 버리셔도 좋으니 한모금만이라도 마셔보세요."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슬픈 생각이 달콤한 레모네이드 한 모금에 단 1초만이라도 흐려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