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연재 중
안녕하세요 종양내과 병동입니다
13화
어느 90억대 자산가
by
서원
Sep 25. 2025
회진을 돌 때 보는 환자들의 표정은 크게 두 가지다. 무표정 또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 환자를 바라보는 나 역시도 아마 그들과 비슷한 표정일 것 같다.
오늘 아침 회진 때 본 환자는 조금 달랐다. 70대 췌장암 4기 환자였다. 침상 커튼을 열면서 환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눈동자에 즐거움을 가득 담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절로 내 입꼬리도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환자가 바라보고 있는 태블릿 화면을 보니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림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화투였다.
칙칙한 종양내과 병동의 공기와는 달리 화면 속 세상은 생기가 넘쳤다.
"OOO님, 돈 많이 따셨나 봐요~?"
환자는 여기 좀 보라며 터치펜으로 본인 화투 밑에 적힌 숫자를 가리켰다.
'93억 3천만 냥'
다른 참가자들의 화투 밑 숫자를 보니 10-20억 냥 정도였다. 다들 억대 단위의 재산(?)을 가진 자산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환자는 꽤 잘하는 편인 듯했다.
"와~ 진짜 부자시네요. 엄청 잘하시나 봐요."
환자는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항암치료가 힘든 것도 잊은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 그는 기대여명이 1년도 채 안 남은 '췌장암 4기 환자'가 아니라 '90억대 자산가 타짜'였다.
췌장암은 그에게서 시간을 앗아가고 있었지만, 게임 속에서 그의 시간은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항암제뿐이었지만, 화투는 그에게 미소를 주었다.
keyword
미소
항암치료
환자
Brunch Book
목요일
연재
연재
안녕하세요 종양내과 병동입니다
11
환자가 아프다 보호자도 아프다
12
아프고 외로운 밤
13
어느 90억대 자산가
14
커튼이 열린 이유
15
그의 최선
전체 목차 보기
36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멤버쉽
서원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감정애쓰다> 출간작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이 많은 내과 의사. 마흔을 앞둔 지금, 의학 '드라마'를 넘어 진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구독자
58
구독
월간 멤버십 가입
월간 멤버십 가입
이전 12화
아프고 외로운 밤
커튼이 열린 이유
다음 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