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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90억대 자산가

by 서원

회진을 돌 때 보는 환자들의 표정은 크게 두 가지다. 무표정 또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 환자를 바라보는 나 역시도 아마 그들과 비슷한 표정일 것 같다.

오늘 아침 회진 때 본 환자는 조금 달랐다. 70대 췌장암 4기 환자였다. 침상 커튼을 열면서 환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눈동자에 즐거움을 가득 담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절로 내 입꼬리도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환자가 바라보고 있는 태블릿 화면을 보니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림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화투였다. 칙칙한 종양내과 병동의 공기와는 달리 화면 속 세상은 생기가 넘쳤다.

"OOO님, 돈 많이 따셨나 봐요~?"

환자는 여기 좀 보라며 터치펜으로 본인 화투 밑에 적힌 숫자를 가리켰다.

'93억 3천만 냥'

다른 참가자들의 화투 밑 숫자를 보니 10-20억 냥 정도였다. 다들 억대 단위의 재산(?)을 가진 자산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환자는 꽤 잘하는 편인 듯했다.

"와~ 진짜 부자시네요. 엄청 잘하시나 봐요."

환자는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항암치료가 힘든 것도 잊은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 그는 기대여명이 1년도 채 안 남은 '췌장암 4기 환자'가 아니라 '90억대 자산가 타짜'였다. 췌장암은 그에게서 시간을 앗아가고 있었지만, 게임 속에서 그의 시간은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항암제뿐이었지만, 화투는 그에게 미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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