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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리 Sep 17. 2022

차와 함께한 그림책

가을 아침 대홍포



지인의 찻자리에 초대받아 토요일 오전 다양한 청차를 마시고 왔다. 대홍포, 철라한, 육계, 기란, 녹차인 우전까지 한 시간 넘게 차를 마시니 비염으로 살짝 고생 중인 심신이 차분해졌다. 특히 처음에 마신 대홍포가 가을 아침과 잘 맞았다. 옅은 비가 내리고 꾸물했던 아침, 밝게 눈이 떠지고 몸의 온도가 알맞게 올라간다.



처음 본 20대 두 분이 있었는데, 차를 두고 모여서인지 어색함은 없었다. 포장해간 쿠키를 먹고 이런저런 차 얘기를 하다가 어제 ‘야간비행’ 독토 모임에서 읽은 “아리에트와 그림자들”을 읽어주었다. 찻자리와 잘 어울릴만한 그림책 한 권을 챙겨가겠다고 했었는데 어젯밤 독토 모임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그대로 들고 간 것이다. 다행히 그림책을 처음 경험한 젊은 20대분들이 재미있게 들어주어 감사했다.


“아리에트와 그림자들”은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 프리마 수상작으로 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을 받았다. 프랑스 작가인데 일본 그림책의 영향을 받은 듯한 그림체로 사자 그림자를 보면 사노 요코의 “하늘을 나는 사자”가 연상되기도 했다. 원제는 Les reflets d’Hariett로 아리에트의 그림자인 사자가 연못 위, 웅덩이 위, 거울 위, 선생님의 안경 위에 비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화려한 색감과 생동감 있는 선들이 사자의 특징과 잘 어우러진다.


 


어느 날, 사자가 죽고 사자의 그림자만 살아남는다. 그림자는 길을 떠나 누구의 그림자가 될지 고민하다가 아리에트의 그림자가 되기로 한다. 사자의 그림자를 갖게 된 아리에트는 어쩐지 조금 사나워 보이고 힘이 솟는 자신을 느낀다. 학교에서는 맹수처럼 뛰놀고 발표 시간도 두렵지 않다. 자신의 그림자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최고의 날을 보낸 아리에트는 자유롭고 활기차 보인다. 하지만 사자의 그림자는 너무 맹수처럼 사납기도 했고 친구들을 겁주며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을 당황시키고 만다. 야단을 맞은 아리에트는 그제야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본다.


“넌 사자의 그림자잖아. 나는 사자가 아니야.”


아리에트는 침대 밑, 나와 가깝지만 어두운 곳에 있던 작은 상자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제 두 개의 그림자와 마주한다.


심리학에서의 그림자는 숨기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고 혹은 내가 갖고 있지 않아 두렵고 무서운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사자의 그림자로 인해 맛본 즐거움, 자신은 아니지만 자신이 갖고 있지 않던 힘과 용기를 경험한 이상 아리에트는 사자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수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살면서 언제든 여러 이유로 사자와 같은 그림자를 불시에 만날  있고 사자의 그림자가 필요한 때가 오기도 한다. 나를 잃지 않으면서 나와 다른 그림자를 함께 받아들이는 , 내가 아니지만 내가 되고 싶은 그림자를 포용하고 통합시키는 일은 아리에트가 더욱 아리에트 다워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그림자든 잘 만나고, 잘 보내기도 하며 평생 해야 하는 작업이라면 후회 없이 즐겁게 하고 싶다.  잠든 그림자들을 흔들어 깨우고, 밖에 밀쳐둔 그림자들을 새로이 만나며 다양한 모습으로 즐겁게 걷고 뛰면서 말이다.


찻 잎이 가볍게 떠오르며 갖고 있던 색과 향을 내어주는 시간, 가을빛이 담긴 찻잔과 그림책 마지막 면지에 가득한 여러 물 웅덩이에 조용히 나를 비추어 본다. 안녕, 그림자들!  우리 같이 놀자 ^^



아리에트와 그림자들 | 마리옹 카디 글, 그림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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