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블라인드 틈새로 햇빛이 간신히 들어오고 있었다. 지수는 식탁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빤히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눈을 가려버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금 본인의 침대에 누워있는 윤슬이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윤슬이를 일으켜 세워 왜 이렇게 나를 망쳐놓았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윤슬이는 아무 잘못도 없었고, 그저 미련하고 모진 내 탓인데 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지수는 재떨이 대신 흰 유리그릇 하나를 식탁에 가져와, 담배를 빼어 물었다.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윤슬이가 일어났다. 지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참 복에 겨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침대 뒤편에 있는 블라인드에서 새어 나오는 햇빛이 조명 역할을 톡톡히 하는 데다가, 평소 형광등이라면 질색하는 지수 때문에 지수의 집에는 늘 전구색 플로어 스탠드 하나만이 텅 빈 벽을 비추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빛이 오묘하게 결합되어 윤슬이의 형체를 적당히 가감하여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어젯밤 본인이 본 윤슬이 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왜 여기서 담배 피워. 나 담배 냄새 싫어한다고 했잖아.”
윤슬이는 뜬 듯 뜨지 않은 듯, 눈덩이를 간신히 부여잡고는 말했다.
“미안. 화장실 가서 필게. 근데 너 옷 안 입어도 괜찮겠어?”
“응. 이게 편해. 그것보다 침대 냄새 좋다.”
“평소 내 살 냄새지. 변태처럼 실컷 들이마셔도 뭐라고 안 할게.”
윤슬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침대 밖으로 나와 제 집처럼 냉장고를 열어서는 야채 칸에 있는 사과를 집어 들었다. 지수는 과도果刀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환풍구에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세면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윤슬이는 뭐가 좋다고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이후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지수와 윤슬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 대한 그 어떤 애정행각과 터치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서로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지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중년부부처럼 각자의 해야 할 일에 매진할 뿐이었다.
윤슬이 지수의 집을 나선 것은, 삼십 분 정도 후였다. 지수는 윤슬에게 길도 알려줄 겸, 담배도 한 대 더 태울 겸이라는 꽤 그럴싸한 핑계로 윤슬과 함께 집을 나섰다. 역시나 그 어느 날보다 화창했다. 지수의 집은 남향이었지만 바로 앞에 큰 오피스텔 하나가 햇빛의 침투를 막고 있어서, 햇빛이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날이면 그 날은 어김없이 햇빛이 너무도 쨍해서, 지수는 선스크린을 평소보다 조금 더 두껍게 발라야겠다는 교훈을 상기하고는 했다. 지수는 솔직히 윤슬이 자신의 손을 한 번쯤은 잡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사랑한다는 말쯤은 툭하고 던져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윤슬은 매정했고, 지수는 그런 윤슬을 잘 가라는 말 정도로 떠나보내야 했다.
집에 들어오자, 어젯밤 윤슬과 함께 먹은 술병이 싱크대 옆에 쌓여있었고, 화장실에는 윤슬의 머리카락이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사실 윤슬과 자신의 머리카락 길이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는데, 윤슬이의 노란빛이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어서 알아볼 수 있었다. 집 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를 끝내고, 지수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윤슬의 냄새로 가득해서, 지수는 어젯밤 자신이 윤슬과 침대에서 노닥거렸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널브러져 있는 콘돔 껍질과 쓰지 않은 콘돔이, 어젯밤 끔찍한 사건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수는 이내 자신의 떨어져 나간 남근을 생각하며, 정체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지수는 윤슬과 섹스를 하는 꿈을 꾸었다. 어젯밤 하지 못한 그 섹스를 하는 꿈을. 그 꿈에서 지수의 남근은 멀쩡했으며, 시간이 지나서 쓰레기통에 버린 콘돔에도 내용물이 있었다. 지수가 콘돔을 버리고 윤슬의 품에 안기자마자, 지수는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지수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는데, 어젯밤 섹스를 하지 못한 한심함이 아닌, 없어진 남근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윤슬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함 때문이었다. 물론, 만나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한 편으로는 웃기는 일이라고 지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고, 윤슬 역시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어젯밤 둘 사이에서 발화된 사랑 해, 라는 말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꽂힌 시선은 그것이 진실임을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만, 지수는 어젯밤 윤슬과 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마 하더라도 키스 정도에서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히 충동적인 만남이었다. 지수는 평소 학과에서 알아주는 미친놈이었다. 물론 철학과라는 걸 고려해보면, 여기에 진학한 모든 놈이 미친놈이겠지만, 지수는 유독 심했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것은 물론, 그 누구보다 오만하며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 난 놈인 줄 알며 나르시시즘이 누구보다 강했다. 다만 나르시시즘이 다른 사람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바로 자기혐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몰아붙이며, 스스로를 우울의 밑바닥까지 잠수시키는, 그런 사람.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을 포착할 때면 그 우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지만, 한 편으로는 그 우울함에 알 수 없는 쾌락을 느끼는 그런 사람. 그게 지수였다.
그런 지수보다 한 학번 선배인 윤슬은, 다만 인연이 없어 지수와 친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에서인지, 어디서 번호를 알아냈는지, 느닷없이 윤슬은 지수에게 친해지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지수는 윤슬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생각이 다른 멍청이들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멍청하게 플라톤이니, 칸트니, 레비나스니 하는 인간들의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조금은 자기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지수가 알고 있는 윤슬의 전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수는 윤슬이 먼저 내민 손을 걷어찰 이유가 전혀 없었고, 어젯밤 술자리를 약속한 것이었다. 지수가 예상한 대로 술자리는 꽤 흥겨웠다. 게다가, 항상 먼발치에서 바라본 윤슬을 가까이서 처음 본 지수는 윤슬이 상당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소녀틱한 매력도 있었고, 귓바퀴에 박혀있는 피어싱도 꽤 섹시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때마다 턱을 괴고 고개를 반쯤 꺾어서는 몽롱한 눈빛을 보내는 게 좋았다.
“누나는 어떤 가수 좋아해요?”
“누나는 무슨, 그냥 완전히 말 놔.”
지수는 이것마저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아, 이렇게도 격이 없는 인간이라니!
“그럼 넌 가수 누구 좋아하는데?”
“검정치마나 아도이.”
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빵 터져버렸는데, 그건 윤슬이 좋아할 거 같은 가수를 정확하게 예측해서였다.
“왜 웃어?”
“그냥, 내가 예측한 대로 말해서.”
이후 소주를 세 병 정도 더 마시고 나서야, 둘은 자리를 옮겼다. 옮긴 곳은 학교에서 꽤 유명한 이자카야였는데, 모든 방이 룸 형식으로 되어있어 인기가 있었다. 지수는 평소 본인의 주량이 훨씬 넘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취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같이 마셔서 그런가, 라는 생각뿐이었다.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윤슬의 질문이었다. 잘 흐르고 있던 대화의 방향을 제멋대로 휙 바꾸고는 물어본 탓에, 지수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에 든 질문이 나왔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한껏 올려 말했다.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잘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겠니?”
“사랑은 사랑이지. 그건 불가해한 영역이잖아. 그걸 어떻게 알겠어. 알 수 없어, 그건. 말 그대로 사랑은 사랑인 거지.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 상대방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 차마 내 그릇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마음? 그런 걸로는 설명이 안 되지. 그냥, 느끼는 거지. 사랑은 사랑이다!”
지수의 말이 끝나자, 윤슬의 눈빛은 몽롱하다 못해 야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지수가 느끼기에는 계속해서 말을 해보라는 것 같았다.
“사랑은 직관하는 거지. 그걸 앎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나도 여기에 대해 생각 진짜 많이 해봤거든. 사랑이란 뭘까. 사랑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손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더라고. 마치 언어의 독단 같다고 할까. 구태여 사랑이라는 말을 만든 건, 그냥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서 만든 것뿐이고, 한 주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건 언어로써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윤슬은 테이블 위에 받치고 있던 팔에서 자신의 얼굴을 떼어내어 고개를 푹 숙이더니, 혼자 조용히 낄낄댔다. 지수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이것은 자신의 소신이기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사랑은 사랑이지. 그럼 넌 사랑해본 적 있어?”
윤슬이 말했다.
“글쎄다. 근데 확실한 건, 적어도 지금은 널 사랑하는 거 같은데. 넌 어때?”
윤슬은 눈썹을 미간 쪽으로 모으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왜 널 좋아하는 줄 알아? 정의 내릴 수 없어서야. 넌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잖아. 되게 중성적이란 말이지. 젠더로 포착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너 같아. 그걸로 포착이 안 되니까, 다른 것들로도 포착이 잘 안 돼. 아니, 하면 안 될 거 같아. 인간이다. 오직 이것만으로 포착될 수 있는 무언가 같다고 해야 할까. 잠재태적인 무언가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난 그래.”
지수는 그 말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배설욕을 느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 하나를 털어놓아야만 할 것 같은, 그런 배설욕.
“그럼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뭔데?”
“나 사실 좆이 없어.”
“거짓말.”
“진짜야. 없어진 지 꽤 됐어. 아마 육 개월쯤 됐나? 그래서인지 성욕도 없어져서는 모든 것에 초연해진 거 같아. 되게 웃기지?”
윤슬은 지수가 술에 잔뜩 취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듯이 웃어댔다. 역시 넌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며, 한바탕 웃고 나서야 지수의 진지한 표정을 응시했다.
“으음. 알았어. 믿어는 줄게. 우리 이제 계산하고 나갈까?”
술집을 나오고 나서부터는 뻔한 레퍼토리였다. 자연스레 술도 깰 겸 산책을 하자는 지수의 제안에, 윤슬은 흔쾌히 허락했고 둘은 달빛이 비치는 학교 근처 천을 손깍지를 끼고 산책했다. 멀뚱멀뚱 서있는 왜가리를 보며 즐거워하고, 벤치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한 번씩 머리를 기대는 행위도 했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예정된 순리처럼, 윤슬은 지수의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지수가 느낀 공허함은 도무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윤슬까지 지수의 연락에 시큰둥했다. 잘 연락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학교에 마주치는 족족 지수를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이방인처럼 대하는 태도에, 지수는 한층 우울해졌다. 그러자 자신이 그날 윤슬에게 느꼈던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지수는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사랑이 아닌 것에 훨씬 가까웠다.
지수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윤슬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지수는 모든 수업을 결석하고, 계속해서 인문대를 서성였다. 계속해서 마주쳤던 곳에서 서성이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윤슬은 그 사이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삼일이 되도록 지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윤슬이 의도적으로 지수를 피해 다닌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윤슬이 완전히 귀신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흘 째 되던 날, 지수는 윤슬을 인문대 삼층 로비에서 발견했고, 그 즉시 뛰어가서 윤슬의 손을 낚아챘다.
“왜 계속 날 피하는 거야? 나랑 얘기 좀 해.”
“그래, 알았어.”
윤슬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지수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지수는 학내 카페에 윤슬을 학내 카페에 데려갔다. 그곳은 일층과 이층이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일층은 그냥 카페의 용도로 쓰이고 있었고 이층은 세미나실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 탓에 이층은 이중 유리막으로 되어있어 내부에서 얘기하는 것들이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는데, 마침 지수가 카페 점장과 친한 덕분에 그곳을 쓸 수 있었다.
“할 얘기가 뭔데.”
윤슬은 평소보다 혈색이 좋지 못했다. 물론, 립을 제대로 바르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얼굴이 누르스름한 것이 평소 지수가 알던 윤슬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아니, 안 아파.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왜 날 피하는 거야?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잘못한 것도 없고, 널 피한 적도 없어.”
“그럼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윤슬은 창 밖에 피어있는 보라색 철쭉을 훑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뭘 더 얘기해야겠니. 우리가 만난 그날, 우리는 사랑을 한 거지. 그게 끝인 거지.”
“어떻게 그게 끝이야?”
“그럼 나랑 사귀기라도 하게? 너 싫잖아. 나도 사귀는 건 싫어. 그런 모종의 관계를 맺어서 내가 구속당하는 건 정말 질색이야. 그냥 그날 우리가 사랑한 거면 족하잖아.”
“그게 어떻게 끝이야? 난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잖아, 아니야? 우리의 관계가 가볍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 근데 어떻게 감정까지 가벼운 걸로 치부하는 거야?”
“그럼 그날 너랑 내가 느꼈던 감정이 모두 무거운 거야? 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는 사랑을 했을 뿐이고, 그건 그날 묻어둔 것뿐이야.”
지수는 엄지손가락 가장자리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살갗을 물어뜯었다. 피가 줄줄 나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날 섹스를 못해줘서 그러니?”
“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잘 모르겠다.”
윤슬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지수의 엄지손가락을 혐오스러운 듯 한번 흘기고는, 이내 짐을 챙겨 자리를 벅차고 일어섰다. 지수는 그런 윤슬을 잡지도, 부르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야. 또 이런 식이고.’
지수는 중얼거리며 주먹을 테이블에 올린 채 파르르 떨었다. 지수가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늘 이런 모양새로 끝이 났다.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 혹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사랑이라고 느꼈던 것들은 지수에게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했다. 상대방은 가벼운 관계를 감정마저 가볍다고 생각하기 일쑤였고, 지수는 그런 상대방에게 늘 상처 받은 모양새. 어쩌면 잠자리가 문제라고 생각해서, 없어진 남근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남근이 문제인 거 같아, 지수는 처음으로 없어진 남근을 원망했다.
*
이후에도 윤슬은 지수를 피해 다녔다. 윤슬은 노골적으로 지수의 동선과는 다른 동선으로 다녔고, 지수도 그런 윤슬을 배려한답시고 일부러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들 사이에는 그렇게 암묵적인 경계선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 경계선은 넘으래야 넘을 수 없는 금기의 경계선이었다. 하지만 그 금기를 깨트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윤슬뿐이었다. 지수가 백날 경계석을 발로 지우고 폭탄을 터트리고 넘어가려고 점프를 해보아도 윤슬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윤슬은 아주 쉽게, 그 선을 마치 고무 줄넘기하듯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수와 윤슬의 차이였다.
시간이 지나고 지수는 윤슬에 대한 감정이 희석되었고, 지수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 만난 사람 역시 남근이 문제였다. 없는 남근을 보며 실망하고, 경악하고, 당황해하는 사람들은 지수를 기피했고, 지수 역시 그들보다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섹스를 하지 못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섹스와 사랑은 엄밀히 다르지만 그 근본을 따져 들어가면 똑같기 때문에 꼭 섹스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수의 남근이 없어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더니,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다. 그뿐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병원에 당장 달려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수는 오히려 아주 기쁜 듯 쾌재를 불렀다. 무언가 골칫거리가 하나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수는 섹스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육욕肉慾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사랑의 느낌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이어야만 한다. 절대로 그것은 성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수의 생각은 일관되고, 확고했다.
지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저 사전적 정의처럼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제 나름의 사랑을 마음껏 하고 있었고, 지수는 그런 그들이 신기했다. 도대체 저들은 누가 사랑을 가르쳐준 것일까. 사랑은 배움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정도로 지수는 사랑을 모른다고 자부했으며, 그럼에도 그것이 섹스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다음 학기가 되어서야 지수는 윤슬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은 같은 소수과라는 특성답게 수업이 하나쯤은 겹쳤다. 윤슬은 전과 다르게 야위었고, 피부 역시 푸석푸석해졌다. 무언가 고민거리를 한가득 안은 사람처럼 한숨을 푹푹 쉬고 빈번할 정도로 담배를 피워댔다. 담배 피우던 걸 싫어하던 인간이 갑자기 담배라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저럴까. 지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윤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잘 지냈어?”
윤슬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대답을 했다.
“어... 너는?”
“나야 뭐 잘 지내지.”
“용건이 뭐야?”
“잠시 얘기 좀 하자.”
윤슬은 알겠다는 듯 가지고 온 아이패드와 전공책을 가방에 넣고 지수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그때 우리가 헤어진 학내 카페 세미나실로 향했다. 역시 오늘도 카페 사장님의 배려 덕에 이곳을 사용할 수 있었다.
“뭔데 할 말이.”
윤슬은 초조한 듯 시선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한 채 말을 걸었다.
“너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야 고작 그딴 말 하려고 부른 거야?”
“그딴 말이라니. 너 걱정돼서 말하는 거 아니야.”
윤슬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지수는 그런 윤슬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나 하나만 물어보자. 진짜 내가 그게 없어서. 그러니까 좆이 없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정말로 유치한 질문이다.
“미친 새끼. 진짜 몰라서 물어?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냥 그날 밤은 사랑했고 그다음 날은 사랑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사랑하고 싶으면 연애를 하든가. 근데 넌 연애도 안 하잖아?”
“연애가 사랑은 아니잖아.”
“아니지. 아니야. 근데 사랑을 보장해주는 아주 확실한 관계 도지. 난 너만을 사랑합니다. 바람피우지 않겠습니다. 뭐 그런 세속적인 약속을 암묵적으로 하는 거잖아. 근데 난 너랑 연애하기 싫어. 근데 그날은 진짜 사랑했어. 그날 이후로 사랑하지 않을 뿐이야.”
윤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윤슬이 나간 이후에도 지수는 벙쪄서 자신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
아마 작년부터였을 거다. 그러니까 지수의 남근이 떨어지고 난 이후부터. 지수가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그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그렇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복잡하고 뒤얽혀있는 그 감정을 포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마음 한 편을 뜨겁게 달구는 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당장 너랑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너에게 내 세계를 모조리 던지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수는 꾸준히 이성친구의 관계에 대해 꽤 비관적이었다. 적어도 이성애자인 이상, 남과 여라는 상이한 성별을 가진 친구 관계는 FWB가 되거나, 한쪽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베일에 씌운 채 평생 지내거나. 웃긴 건, 지수의 이런 선언이자 단언이 윤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윤슬은 지수와 자신 사이에 커다란 성벽을 쳤다. 서로 그다지 바쁘지 않았음에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 자연스레 관계의 거리도 마치 척력을 행사한 것처럼 멀어졌다. 동시에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불어 닥친 지수에게, 윤슬과의 관계 역시 오묘하게 다가왔다. 그 오묘함이란, 얘가 도대체 나에게 뭘까 라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와 감정에 대한 물음이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이내 믿음이 된다. 윤슬의 관계를 의심하자 마음에 안개가 아주 두껍게 드리웠다. 지수는 윤슬을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윤슬은 나에게 도대체 뭘까. 윤슬과 술을 마실 때 같은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그래, 얘는 이런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을 지었지. 그치, 얘는 꽤 예쁘지. 항상 했던 생각이었지만, 윤슬은 예쁘다. 물론 이 가치평가에 지수의 사심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예쁘니까 예쁘다고 말한 거라고. 이게 단순한 감상일 뿐인 걸까. 생각해보니 지수는 윤슬에 대해 참 많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 나 얘 좋아하는구나. 이게 좋아하는 거구나. 그래, 나 얘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
지수는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섹스는 섹스일 뿐이잖아
섹스라니. 갓 스무 살이 된 지수에게 섹스란 볼드모트 같았는데(쉿! 그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지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단어를 떠들어댔다. 아, 섹스라. 그걸 하면 결혼하는 건가. 아니지,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원나잇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래도 섹스라 함은 상대방과 가약을 맺을 각오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듯 스무 살의 지수에게 섹스는 낭만성과 순수성으로 쌓아 올린 보루였다.
하지만 남들은 아니었다. 남들은 금요일마다 클럽과 감성주점을 번갈아가며 다녔다. 매번 알딸딸한 상태로 테이블을 휘젓고 다녔다. 남들은 질퍽거리는 숨소리에 달콤한 단어들을 상대방의 귓속에 뱉어댔다. 아니면 스테이지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그 사람의 뒤로 가서 자신의 몸을 열심히 비벼댔다. 전자건 후자 건, 상대방의 입가에 초승달이 그려질 때면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꽤 잘 알았다.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들은 연애라고 불릴만한 것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연애하기에는 아깝다나 뭐라나. 한 사람에게만 종속되기에는 자신의 매력이 아깝고, 젊은 날을 낭비하는 거 같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랬다.
그들의 카톡창에는 애인들이 가득했다. 자기야, 여보야부터 시작해서 손발이 오그라들어 없어질 거 같은 별명들을 불러가며 서로의 애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이건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긴장감과 책임감을 갈라놓았다. 친구는 성적인 긴장감은 충분히 즐기기 위한 선을 주욱 그어놓고, 관계에서 오는 책임감은 모조리 선 밖에 있다며 자신에게 관계를 강요하지 말라며 열불을 냈다.
뭐, 그게 그 사람이 선택한 삶이니까. 지수가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건 자신의 몫이니까. 그 살얼음판에 금이 가고, 그 금으로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구멍이 나서 자신의 관계가 망쳐지는 건 본인의 몫이니까. 어쩌면 본인이 주욱주욱 그어대던 선 때문에 금이 가는 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애인 중 한 명이 좋아졌단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다가도 한 편으로 이해가 됐다. 그때 지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뭘 그렇게 재고 있어? 그냥 좋아하면 안 돼?”
그 사람은 헛웃음을 치며 지수에게 말했다.
“여보세요.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거예요. 한 번 해보셔요.”
*
지수는 결국 그들의 삶을 똑같이 답습했다. 여러 여자를 만났고, 남자도 만났다. 하지만 모두 일회적인 만남일 뿐이었다. 윤슬과 만났을 때처럼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소모적인 관계.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었다. 그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이 관계에 대해서, 지수는 윤슬을 만나며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수는 윤슬을 좋아한다. 하지만 윤슬은 아닌 듯하다. 지수는 할 수 없는 섹스를 생각하며 윤슬을 생각한다. 과연 섹스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 섹스였을까. 아니면 둘 다 아니었을까. 지수는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널브러진 콘돔을 보며 지수는 어떤 감정을 떠올렸다. 일부러 치우지 않은 그 콘돔에서, 지수는 알 수 없는 자책과 사랑 따위를 느꼈다. 도대체 윤슬은 왜 자신을 그 날만 사랑한 것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빨리 휘발되어 날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섹스를 하지 못해서, 즉 사랑을 완성하지 못해서? 온갖 잡생각이 지수의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하지만 매워진 생각들은 지수를 명료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지수는 다시 한번 윤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싫어진 이유를 얘기해줘. 난 너를 사랑하고 싶어.
몇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수는 계속해서 휴대폰을 껐다가, 알람도 껐다가, 별 짓을 다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 시간쯤 흘렀을 때 답장이 날라 왔다.
구질구질 해 너. 그냥 그만 해라. 그날 사랑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사랑? 그 날의 사랑? 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 빨리 상해버리고 변해버리는 날것의 감정이었다니. 하지만 지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지수는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줘.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원하면 어떻게든 섹스라도 해볼게. 정말이야.
지수는 휴대폰을 책상에 올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쳐들어 담배를 피우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집 밖으로 닿지 못한 부연 담배 연기가 방안을 맴돌았다.
*
윤슬은 휴학을 했다. 휴학계를 내러 과사무실에 온 윤슬을, 근로장학생인 지수가 보았다. 지수는 윤슬을 따라나가 붙잡았다. 윤슬은 예전보다 더 퀭해진 얼굴로 지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지수는 그런 윤슬을 보며 더 울적해져서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미안.”
적막과 애잔함이 부유하던 분위기를 먼저 깬 건 윤슬이었다. 윤슬은 지수에게 농담 같은 어투로 말을 건넸고, 지수는 그런 윤슬을 꼭 껴안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윤슬의 눈이 지수의 어깨에 닿았고, 윤슬은 서러운 아이처럼 끅끅거리며 울었다. 지수는 이 한정할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지수에게 논리적 인과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윤슬이 조금 진정이 되고, 지수는 윤슬에게 휴학을 하고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봤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럴 거야. 너라면 잘 해낼 거야.”
“나 너 진짜 사랑했어.”
“거짓말.”
“진심이야. 만약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윤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지수는 그렇게 집에 왔지만, 잠이 오질 않아 집 근처 온천천을 찬찬히 산책하다 자신이 윤슬과 같이 앉았던 벤치에 앉았다. 여명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고, 바람이 아주 조금씩 옷자락을 건드렸다. 지수는 감각을 지나가는 이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물과 돌, 풀과 바람, 그리고 벤치와 윤슬. 지수는 형용할 수 없는 이 존재와 그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 무엇도, 그들의 마음을 하나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