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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뫼르달 Jun 17. 2023

복숭아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지금 낡고 허름한 모텔의 가장 좁은 방입니다

사방이 온통 오렌지향 살충제로 도배된 곳이지요

창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이곳은 무척 위태롭고,

6층은 충분히 위험한 높이라서요

중요한 소식이 들려올까요 도통 입맛이 없는 걸 보면

이제야 여름인가 봅니다 달큰하고 무른 과일들로 끼니를 해요

하늘소와 사슴벌레의 식단을 배웠습니다 조금만 먹고 조금만 움직입니다

차가운 물로만 몸을 씻는답니다 단단한 껍질을 갖고 싶거든요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버려도 몰라요)



이름을 바꿀 채비를 하는 중입니다 아주 멀리 떠날 예정이므로

쉽지 않은 비행이 되겠지만, 아무렴 어때요?

애인의 따스한 혓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눈깔사탕 같은 이름을 갖고 싶어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녹아버릴래요

7월의 정오가 되면, 우린 모두 뜨뜻미지근한 물주머니가 되어버릴 거예요



달콤한 혓바닥을 갖게 된다면 꼭 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아, 하고 입을 벌려보세요 충분히 들려드릴게요

삐걱대는 선풍기와 함께 홈쇼핑 채널을 주시합니다

아주 커다란 냉장고를 살까 싶어요 코끼리를 넣는 냉장고 말이에요

아님 아주 자그마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왜 자꾸만 고개를 흔드는 거니, 삐걱삐걱



오늘도 열심히 훈련을 하는 중입니다 상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요

구령에 맞추어 정확한 동작으로 반복 운동 해주세요

복숭아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세요, 잔잔한 솜털들을 하나하나 느껴보세요

(만약 복숭아가 없다면 갓난아이의 말캉한 뒤통수로 대신해도 좋습니다)

당신을 아프게 하진 않으려고요

짓무른 껍질은 과감하게 뜯어주세요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잖아요?

가끔은 터져버릴 정도로 힘껏 껴안아줄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이건 복숭아일 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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