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웅 Mar 01. 2018

누구에게나 취향의 방 19호실이 있다

취향이라는 이름의 성역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19호실이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방.
아무리 편해져도 초대할 수 없는
그런 방.



50페이지의 충격 "19호실 이야기"

남편 매튜 로링즈 : 신문사 편집자

아내 수잔 로링즈 : 광고회사 직원

29살 결혼, 성격 원만함, 정원이 딸린 집과 좋은 차 보유, 네 아이의 부모


이 이야기는 로링즈 부부의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잔이라는 부인의 이야기다. 매튜와 수잔은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고 성격도 무난하였으며 인간관계도 좋았다. 이들은 적절한 나이에 적절한 규모로 한마디로 적절한 결혼을 하게 된다.


좋은 커리어를 쌓았고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있었고 조금 있으면 막내 쌍둥이가 곧 학교에 간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곧 쌍둥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 9시부터 4시까지는 집에서 떠나 있게 될 것이다. 수잔은 그 시간이 가정의 중추 역할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가진 여자로 서서히 변해 가는 준비기간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녀가 오직 그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녀는 이 순간을 고대해왔다. 그녀는 곧 결혼하기 바로 직전인 29살의 나이로 돌아갈 거라는 환상에 젖었다. 마치 냉동인간의 부활처럼 마침내 그때의 뜨거운 열정과 변치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난 12년간 한 순간도 혼자 인적이 없었던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자그마한 공백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공백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고 점점 더 큰 공백을 갈구하게 된다. 그녀는 공원에 나가기도 하고 집안에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하기도 해보고 여행을 떠나도 보지만 그녀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딜 가나 어디에 있거나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날 먼 도시에 있는 허름한 호텔방을 잡아 하루 종일 머문다. 그녀가 머문 19호실은 별나지 않다. 허름한 외관만큼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온전한 자기만의 시간을 즐긴다.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상상 속에 빠져들기도 하고 가만히 방안을 돌아다녀 보기도 한다. 아무도 그녀가 그곳에 있는 줄 모른다. 그녀를 방해할 지인도 전화도 의무도 없는 진정한 자유의 방에 그녀는 서서히 침전한다. 그녀는 그렇게 다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에게 19호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만다. 수잔은 항상 일정한 시간에 사라지고 일정한 시간에 돌아왔다. 평소와 답지 않게 매주 5파운드의 돈(방을 빌리는 돈)을 남편에게 요구했다. 어느 날 남편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비밀을 쫓는다. 그는 두려웠다. 세상 사람들이 특히 자신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수잔이 벗어났을까 봐 걱정했다. 차라리 그녀가 애인이 생겼기를 바랐다.


결국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처럼 나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요" 사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곳은 영혼의 안식처였다고 나를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곳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


그 고백을 들은 매튜는 오히려 안심한다. 만약 그녀가 불륜이 아니었다면 무서웠을 것이라고 독백한다.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불행은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매튜는 수잔의 상대를 직접 대면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매튜에게 불륜이라고 말했지만 충분히 증명하지 못했다. 수잔은 고민에 빠진다. 대역이라도 구해와야 할 것인가? 그에게는 무엇을 해줘야 하지? 애정행각도 보여줘야 하는 걸까? 더 많은 걸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끝끝내 19호실의 정체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내밀함을 매튜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는 결국 19호실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다시 개정되어 출간되었지만 내가 "19호실로 가다"를 읽을 때는 이미 오래전에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책이었다. 책을 수소문하던 중 다행히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빌릴 수 있었다. 여성 작가들의 단편선들로 이루어진 책인데 가장 첫 번째 작품이 바로 19호실로 가다 라는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저자인 도리스 레싱은 우리들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취향의 방 19호실을 소설 속 현실에 옮겨 놓았다. 나는 수잔의 경험과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때때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데 우리는 설명할 수 없음을 비정상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왕왕 목격하곤 한다.


마음의 성역 "19호실"

"19호실로 가다"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책의 메시지는 여성의 삶과 사회구조의 충돌을 다루고 있지만 요즘 같이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계급과 세대 그리고 관계의 권력이 스스럼없이 개인의 내밀한 취향을 침범했다면 지금의 취향은 그 누구에게도 짓밟혀서는 개인의 성역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 있다.


19호실은 무엇일까? 나의 은밀한 취향이 담겨 있는 곳?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담겨 있는 곳? 나이에 맞지 않게 혹은 성별에 맞지 않게 와 같이 남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가이드라인에서 어긋나 있는 것들이 19호실에 가득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은 개인의 마음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보면 '마음의 성역' Sanctity of the human heart이란 말이 나온다. 고전작품인 '주홍글씨'에 나오는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타인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역으로 해석된 sanctity의 의미는 존엄과 신성함으로 표현된다. 즉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훼손받지 않을 최소한의 영역이 있는데 그 영역은 어떤 경우에서든 존중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 혹은 개인의 역사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서로를 그만큼 존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공간으로서 취향의 방

19호실은 내적인 영역임과 동시에 외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강인한 내적 공간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외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꽤 오래전 가족문제로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혹은 가족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족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실 어렸던 나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었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 당시 내게도 문이 달린 나의 방이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족으로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온전한 19호실을 가질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도 되지 않는데 스스로 무기력함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나의 독립생활이 시작된다. 독립한 그 순간부터 아무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나의 공간이 생겼고 모든 면에서 인생의 상향 지표를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 필요한 건 예쁘고 멋진 공간이 아니라 작더라도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내밀한 공간이었다.


당신의 방안에 무엇이 있나요?

대체적으로 내가 오래 머무는 곳들을 나의 취향으로 물들이는 걸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의 작은 한 부분만큼은 내 취향이 들어 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편이다. 대표적인 장소는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이다. 흔히 외국 영화나 미드를 보면 종종 주인공 집안의 아이들 방을 보여주는데 벽마다 붙어있는 슈퍼히어로 포스터와 밀리터리 피규어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노트북이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전형적인 미국 남자아이의 방에 대해 품고 있는 관객의 판타지를 충실히 구현한 느낌이다. 이렇듯 영화 속 방의 구성을 보면 주인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방은 방 주인을 창조해낼 수 있는 증거물로 가득하다.

토드 셀비의 방


자신의 방을 찬찬히 둘러보면 (조금 시간을 두고 정말 천천히 그리고 유심히 둘러보자) 스스로 당신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내 방안에는 주로 정신을 집중하거나 혹은 흩트리는 것들로 가득하다. 어질러져있는 종이책과 전자책들, 늠늠히 서있는 술병들, 음악을 틀 수 있는 기기들과 각종 향을 내는 것들(향초, 양초, 향수)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왜 모으는지 설명할 수 없는 다 쓴 왁스 케이스와 향수 공병들이 책장에 나란히 진열되어있다. 나는 주로 책상에 공을 들이는 편인데 글을 쓰거나 글을 읽을 때 가장 많이 애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업하는데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가사 없는 음악과 적절한 온도의 조명 그리고 참고할 책들이 주변에 무수히 쌓여있다. 작은 방 속에 한 부분이지만 이곳에 앉아있으면 다른 마음가짐이 되곤 한다. 스스로 다른 공간들과 격리시킨 신성한 작업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를 충전하고 또 에너지를 쏟는다.


그다음 오래 머물고 있는 회사 내의 작은 책상이다. 특히 회사의 책상을 누가 봐도 내 자리인 것처럼 만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나름대로 꾸민다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살림살이를 들여놓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지저분한 책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읽지는 않지만 읽을법한 책들 잘 마시지 않지만 언젠가 마시겠다고 다짐하고 곁에 둔 티백들 잠시 멍 때리며 응시하곤 하는 녹색의 화분들 그곳에 앉으면 묘하게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내게 익숙한 것들로 채워진 그곳은 나만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익숙한 공간에 싫증이 나면 외부에서 19호실을 찾기도 한다. 사실 내가 머무는 방은 너무나 내 삶과 맞닿아 있고 회사의 책상은 말 그대로 전투를 하는 공간이지 생각의 분리를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목적을 위해서는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수잔이 굳이 도시 외곽의 낡은 호텔을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익명으로 지나쳐가는 무수히 많은 익명들을 볼 수 있는 곳을 선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외부의 장소지만 나만 오롯이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곤 한다. 보통 이런 장소를 찾으려면 주말마다 발품을 꽤 팔아야 한다. 인테리어나 BGM 그리고 공간의 운영방식 등이 나와 핏이 맞아야 하는데 인터넷 사진이나 눈대중으로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은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한 시간 정도 글을 써보면 이곳이 나랑 맞는 곳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마치 수잔처럼  나의 취향에 맞는 19호실을 이용할 수 있다면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다.



취향은 오리지널리티 그리고 개인 회복 공간이다.

하루키는 취향의 방을 "개인의 회복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사회라는 제도는 결국 줄을 세워 획일화시키고 벽을 세워 구분시키는 작업을 하기 마련이다. 그 제도 속의 자신만의 회복 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개인의 문제를 해결했고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갖추었다. 하루키는 종종 자신만의 19호실로 들어가 비틀즈의 노래를 듣는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키우고 또 그와 다른 오리지널들을 즐기며 영감을 얻는다. 이처럼 취향은 그 사람의 고유한 오리지널리티이고 개인의 은밀한 회복 공간이 된다. 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 속에 가두어진 소셜 애니멀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바로 취향의 발견이다.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생긴다는 것은 견고한 자아정체성을 확립해간다는 것이다. 외부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취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장과 학교에 다닌다. 남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틀 안에서 같은 룰을 지키며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개인 회복 공간이 필요하다.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자신의 내부에 있는 "취향의 방"이다. 취향의 방 안에는 테니스가 있을 수 있고 책 읽기가 있을 수 있고 보사노바풍의 모던 재즈가 있을 수 있다. 적어도 취향의 방안에는 자신이 진정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채울 수 있다. 하루빨리 그 공간을 확보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 마음껏 취하고 나오길 바란다.


개인 회복 공간

만일 책이라는 게 없었다면, 만일 그토록 많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썰렁하고 뻑뻑한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학교였습니다. 나는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개인 회복 공간"은 바로 그런 것에 가까운 곳입니다. 꼭 독서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학교, 회사, 제도에 잘 섞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만일 그런 맞춤형 "개인 회복 공간"을 손에 넣을 수만 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것을 찾아내고 그 가능성을 자신의 공간에서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훌륭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도의 벽"을 극복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 또한 하루키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하는 편이지만 이 방의 용도와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는 회복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창조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투쟁의 공간이다. 그곳은 항상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꿈과 목표가 상영된다. 수잔에게 19호실은 어떤 방이었을까? 그곳엔 무엇이 있었을까? 그녀는 어떤 것들로 그 방을 채워나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물리적인 장소는 어떤 세계를 만들기 위한 촉매 역할을 한다. 그녀가 찾아간 19호실은 비록 낡고 쾌쾌한 곰팡이와 육체들의 끈적한 땀냄새로 뒤범벅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상영하는 개인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네 아이의 엄마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플랜 A로서의 삶이 아니라 열정의 광고 기획자로서 인정과 명성을 쟁취한 플랜 B의 삶과 커피 향과 책향기로 가득한 서점을 운영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플랜 C의 삶을 찬찬히 걸어가 보지 않았을까? 그녀의 19호실이 과거에 종료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아닌 미래의 어떤 선택으로 향할 수 있었다면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공간으로서의 취향의 방에서 내면으로 향하는 취향의 방을 계속 두들겨야 한다. 그곳에 다 달아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 중에서 12시간을 일하고 8시간을 자고 2시간을 출퇴근하는데 쓰고 나머지 두 시간을 가족을 돌보는데 겨우 겨우 사용한다면 스스로와의 대화는 차갑게 외면당하고 만다. 종국에는 나머지 시간들에게 화를 내고 마는 것이다. 나는 왜 속도 없이 8시간을 잤는가? 회사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밤낮없이 일을 한 것인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날 이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이런 비난들로 스스로 상처 입힌다. 지금의 내적인 고통은 잘못된 사회 시스템과 이기적인 주변 사람들로 인해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함정에 빠진 나의 잘못인가? 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담론이다. 이 문제는 누구도 옳은 답을 내려줄 수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면 주변 또한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는 것은 나만의 방을 만드는 기초공사와 같다.

김영하 작가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책을 왜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삶은 실패한 채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우린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만의 내면이 있어야 합니다.

독서라는 행위는 내면을 강화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본적으로 글을 읽는데 집중하는 동안 강력한 내면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매료되면서 자유로운 생각들이 주변을 가득 채우기 마련이다. 현재의 짐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맛볼 수 있는 독서 운동을 반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감성 근육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관계란 무엇일까?

공유돼도 좋을만한 취향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취향의 경계는 무엇일까? 수잔은 자신의 19호실을 보여줄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남편과 가족에게 자신의 방을 설명할만한 언어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 나오는 것처럼 금 밟으셨어요? 더 이상 넘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사회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 불륜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사실 법적인 가족의 관계는 생각보다 우리를 미치게 만들곤 한다. 그들도 결국 가장 친밀한 타인일 뿐이다. 관계가 시작될 때는 상대를 더 알고 싶어서 갈구했지만 애인이나 가족이 되고 나서는 사회적 계약의 의무로서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곤 한다. 왜 친밀한 관계는 모든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가장 친밀한 타인으로서 보통의 타인보다 나를 많이 아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걸까?


나는 친밀하지만 투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투명하고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티 없이 맑다는 건 그만큼 속도 없고 눈치도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한 번은 나의 가장 친밀한 지인이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시간을 들여 많은 얘기를 해주었지만 상대는 공유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있을법한 자그마한 상처부터 드라마틱한 사연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꺼내먹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아갈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밀함들이 꺼내진 순간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떠오르기를 원치 않았다. 19호실 안에 있는 문제들은 전에도 말했듯이 답을 찾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해결하기보단 내려놓기로 한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하여 호텔 방도 따로 얻어 지냈다.  많이 싸우고 많이 헤어졌지만 결국 죽어서는 나란히 묻히기를 원했다. 고비가 많았던 두 사람인데 둘을 마지막까지 하나로 묶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계가 흔들리던 시절에 보부아르는 이런 글을 남긴다.

'그는 나의 영혼을 이해해주고 나의 지성을 발견했으며 성장시켜준 사람입니다. 그와 나누는 대화를 다른 사람과는 나눌 수가 없어요. 나는 사르트르를 떠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타인으로서 존중하는 관계를 받아들였다. 상대의 과거를 소유하기보단 서로의 미래를 발전시키길 원했다. 단지 연인으로서 관계를 한정 짓지 않고 서로에게 다양한 역할을 부여해주었다. 이들은 가장 친밀한 타인이었다.



19호실의 문이 열리고 있다.

독립 책방 / 독립 술집 / 인디 샵 / 그리고 독립적인 삶들

주말이면 개성 있는 공간을 찾아다니곤 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재밌는 독립서점들이 많이 생겨 서점 투어를 하고 있는데 색다른 취향의 서점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 같은 대형서점은 어느 지역을 가나 다를 게 없다. 조금 더 나은 가격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책들을 접할 뿐이다. 하지만 독립 책방의 공간은 다르다. 주인장의 취향을 제대로 반영한 공간과 개성 있는 책들로 가득하다. 마치 활짝 열린 19호실에 들어온 느낌이라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주인장들은 자신들의 19호실의 문을 열고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한다. 물론 겉으로 보여줄 수 있는 취향만을 편집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들의 취향을 드러내는데 두려워하지 않는다.


독립 가게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 자체가 브랜드가 된다. 맛이나 가격이나 인테리어 등이 효율적인 대자본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합리적인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이성적인 주인장의 취향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동네 슈퍼나 음식점을 운영하는 분들을 자영업이라고 부르지만 독립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자영업이라는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전자는 은퇴 후 사장님들의 생존과 밥벌이에 점철되어있다면 후자는 밥벌이와 더불어 자신의 취향을 뽐내며 삶을 즐기는 자아실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이라는 처절함은 동일할지 모르지만 이들은 주체적인 삶을 통해 타인에게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다. (즐거움이 모토여서 그런지 사업으로서 생명력이 길지는 않다. 마음에 드는 인생의 한 구간을 남긴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지 않을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라는 매력적인 책이 있다. 보트 제작자, 생물과학 일러스트레이터, 오브제 창작자, 청년 운동가, 문화 기획자 등 다양한 청년들이 스스로의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항상 이런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이들은 자신의 19호실에서 과감하게 드러낼 것을 찾아냈고 자신의 삶을 일구고 있다. 회피하고 싶은 취향과 사연만 담겨 있는 19호실은 건강하지 못하다. 이들은 타인들이 왜?라는 참견을 할 때 묵묵히 삶으로서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었다. 이 들이 말하는 세 가지 방안은 이렇다.

<주도권을 갖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를 유지한다.>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는 것>


자유를 위한 투쟁 "자기만의 방"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우선 가족을 이해시켜야 하고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사회에 투쟁해야 하며 세상에 만연한 오지랖들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려줘야 한다. 그러려면 스스로 가 부족함에서 우선 벗어나야 하는데 여기서 가장 필요한 건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숙모에게 매년에 500파운드라는 유산을 상속받고 나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의 쓰라림을 기억하건대, 고정된 수입이 사람의 기질을 엄청나게 변화시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하여 나는 스스로 인류의 다른 절반에 대해 아주 미세하나마 새로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상속을 받은 버지니아 울프가 얄미울 수 있겠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한건 부족한 것 없는 부유한 삶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그다지 평탄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면 더 많은 기회들이 열리고 자신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메시지다. 물론 누군가는 3억 5천만 원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는 1000만 원에 50만 원의 월세 집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집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가르는 자신만의 삶의 기준이다.


19호실 안에서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길 바란다. 도리 스래싱의 19호실을, 하루키의 개인 회복공간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쟁취하길 바란다. 그곳은 곧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의 성역이다.



취향의 방 19호실에 가고 싶다.
우리 모두에게는 19호실이라는 취향의 방이 있다.
개인이 스스로 오롯이 설 수 있는 자아의 방이다.
세상의 정의가 아닌 자신만의 정의가 담겨 있는 곳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을 수 있는 곳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곳이다.
내 주위 모든 환경이 무너져내려도 19호실만큼은 지켜내기를 희망한다.
그곳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성역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